회사원 구보씨가 새벽 출근을 하면서 확인한 사실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정말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구보씨는 새벽 다섯시 반에 경기도 일산 집을 나서 좌석버스에 올랐다. 그는 다시 감탄한다. 벌써 좌석이 절반 이상 차 있다. 종점에서 그가 타는 ‘8단지앞’까지 정류장이 서너개밖에 안되는 데도 그렇다. 버스가 더 달려 여섯시가 넘으면 자리가 다 찬다. 버스는 곧 서서 가는 승객들로 만원이 된다.
서울 광화문까지 달리는 버스 속 1시간은 쓰임새가 요긴하다. 부족한 잠도 보충하고 여러 가지 상념에도 젖어본다.
구보씨는 관찰한다. 승객은 학생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이 부지런한 사람들은 대체 잠은 언제 자며 언제 쉴까. 모르긴 해도 새벽에 나갔다 밤에 돌아올 텐데. 아무리 베드타운이라고 해도 집에서 쉴 시간이 너무 적을 거다. 이러면서 개인생활을 즐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마침 버스 안 라디오에서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희망버스’ 어쩌고 하며 한진중공업 소식을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구보씨는 요즘 강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다.
이 버스 승객들 가운데 비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비정규직이 노동자 1700만명의 절반을 넘었다는데 그 비율대로라면 승객의 대략 절반도 비정규직일 것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헛된 궁금증임을 안다. 사실상 규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승객들에게 일일이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되는 질문이다.
어째선가. 비정규직은 임금을 적게 주고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노동시간은 정규직보다 길다. 통근버스, 할인구매 같은 정규직의 복지혜택은 없다. 그 종류·명칭도 많다. 계약직, 임시직, 파트타이머, 일용직, 파견직, 사내하청….
어느 것이건 장시간 저임금 무권리 노동의 상징이란 점에서는 같다. 그는 비정규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정규직의 막다른 골목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다행히 정규직의 일우(一隅)나마 차지하고 있는 구보씨는 이런저런 부채의식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니 옆자리 승객에게 “혹시 비정규직이십니까”라고 물을 엄두도 못 낸다.
라디오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들이 희망버스와 정치인 등 외부세력의 한진중공업 개입을 반대하며 행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행동이란 게 자못 과격하다. 이들은 대한문 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사람은 “텐트 안에 있는 인간말종들을 즉결처분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싫으면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나라”고 외쳤다.
구보씨는 의아해했다. 다른 의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외부세력 아닌가. 툭하면 몰려들어 “어느 나라 국민이냐”며 눈을 부라리는 이들에게 국민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면서 그는 이들이 ‘행동하는 어르신들’이든 ‘가스통 노인들’이든 이런 주장이 극우반공주의에 물든 극히 일부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보씨의 생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로 옮겨간다. 오웰이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쓴 미래의 국가·사회는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당이 절대권력을 갖고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으로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한다.
사람들은 두 개의 상반된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는 ‘이중사고’에 길들여진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이다. 오웰은 권력과 전체주의에 맞서 개인이 저항하다 파멸해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필사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 양심을 검열하고 사상을 검증하려 드는 「1984」식 전체주의는 우리 시대에도 상존해 있지 않나. 얼마 전 국방홍보원이 제작했다는 천안함 안보 동영상은 어땠나. 동영상은 “우리 사회 일부는 명백한 북한 도발도 인정하지 않는 억지여론으로 국민여론을 분열하고 있다. 월남은 국론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망했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이걸 금융사들에 보내 교육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천안시가 실시한 민방위교육에서는 강사가 천안함 사건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 등 극우적 논지를 폈다. 여기에 국가예산으로 1인당 교육참가비 7만원씩을 줬다고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국민이 아니지요.”
민동석 외교통상부 2차관의 사람좋은 얼굴과 목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광화문”이란 안내방송 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깜빡 졸며 꿈을 꿨나 보다.
구보씨는 관찰한다. 승객은 학생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이 부지런한 사람들은 대체 잠은 언제 자며 언제 쉴까. 모르긴 해도 새벽에 나갔다 밤에 돌아올 텐데. 아무리 베드타운이라고 해도 집에서 쉴 시간이 너무 적을 거다. 이러면서 개인생활을 즐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마침 버스 안 라디오에서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희망버스’ 어쩌고 하며 한진중공업 소식을 전한다. 그렇지 않아도 구보씨는 요즘 강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다.
이 버스 승객들 가운데 비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비정규직이 노동자 1700만명의 절반을 넘었다는데 그 비율대로라면 승객의 대략 절반도 비정규직일 것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헛된 궁금증임을 안다. 사실상 규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승객들에게 일일이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되는 질문이다.
어째선가. 비정규직은 임금을 적게 주고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노동시간은 정규직보다 길다. 통근버스, 할인구매 같은 정규직의 복지혜택은 없다. 그 종류·명칭도 많다. 계약직, 임시직, 파트타이머, 일용직, 파견직, 사내하청….
어느 것이건 장시간 저임금 무권리 노동의 상징이란 점에서는 같다. 그는 비정규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정규직의 막다른 골목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다행히 정규직의 일우(一隅)나마 차지하고 있는 구보씨는 이런저런 부채의식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니 옆자리 승객에게 “혹시 비정규직이십니까”라고 물을 엄두도 못 낸다.
라디오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들이 희망버스와 정치인 등 외부세력의 한진중공업 개입을 반대하며 행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행동이란 게 자못 과격하다. 이들은 대한문 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사람은 “텐트 안에 있는 인간말종들을 즉결처분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싫으면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나라”고 외쳤다.
구보씨는 의아해했다. 다른 의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외부세력 아닌가. 툭하면 몰려들어 “어느 나라 국민이냐”며 눈을 부라리는 이들에게 국민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면서 그는 이들이 ‘행동하는 어르신들’이든 ‘가스통 노인들’이든 이런 주장이 극우반공주의에 물든 극히 일부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보씨의 생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로 옮겨간다. 오웰이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쓴 미래의 국가·사회는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당이 절대권력을 갖고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으로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한다.
사람들은 두 개의 상반된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는 ‘이중사고’에 길들여진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이다. 오웰은 권력과 전체주의에 맞서 개인이 저항하다 파멸해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필사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 양심을 검열하고 사상을 검증하려 드는 「1984」식 전체주의는 우리 시대에도 상존해 있지 않나. 얼마 전 국방홍보원이 제작했다는 천안함 안보 동영상은 어땠나. 동영상은 “우리 사회 일부는 명백한 북한 도발도 인정하지 않는 억지여론으로 국민여론을 분열하고 있다. 월남은 국론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망했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이걸 금융사들에 보내 교육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천안시가 실시한 민방위교육에서는 강사가 천안함 사건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 등 극우적 논지를 폈다. 여기에 국가예산으로 1인당 교육참가비 7만원씩을 줬다고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국민이 아니지요.”
민동석 외교통상부 2차관의 사람좋은 얼굴과 목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광화문”이란 안내방송 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깜빡 졸며 꿈을 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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