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울산 현대중공업 등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터졌을 때 도하 신문·방송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어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때는 6월항쟁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현대엔진에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생긴 뒤 노조 결성과 파업 등 쟁의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것이 훗날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명명된 노사분규의 대분출이었다. 이상한 것은 언론의 보도태도였다. 6월항쟁 때 시민 쪽으로 돌아섰던 언론은 이 쟁의의 실상과 본질을 왜곡해 노동자들을 여론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이런 식이었다. ‘무법·광란, 울산시청 수라장…술 마시고 부수고 노래하고’ ‘현대중 300여명 차고 방화 등 난동 1시간’ ‘사장 등 맨바닥 앉히고 폭언’….
6월항쟁 | 경향신문 DB
유감스럽게 경향신문도 이 왜곡 대열에 합류했다. 노사분규 피해가 연쇄파급되는 현장을 보도하며 ‘위험수위 이른 휴업 조단(操短)’이란 제목을 붙였다. ‘PVC 등 자재 품귀·폭등’ ‘9일째 운항 못한 해운사도’ ‘원사 공급 중단…50억 손실’ 등 현저히 기업 편에 서서 보도했다. 사진도 발묶인 컨테이너나 집기가 어지럽게 부서진 분규현장을 즐겨 썼다. ‘동료 폭행 기물파괴 등 예사’라며 노동자들의 과격 폭력성을 강조하고 외세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도 현장 취재에 투입돼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거제 대우 옥포조선소로 다녔다. 그때 기사화는 안 됐지만 현대 쪽 간부가 파업으로 인한 생산차질로 수천억원의 손해를 보게 됐다는, 적이 황당한 설명을 열심히 한 일도 기억난다.
정치적 각성이라고 했지만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임금 인상을 원했다.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1980년을 100으로 했을 때 86년엔 72에 불과했다는 통계가 있다. 간혹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 요구도 나왔다. 두발 자유화 요구도 있었는데 가장 절절한 구호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근로자도 인간이다’였다. 당시 안양 근로자회관에는 ‘잔업 철야 안하고도 먹고살 수 있게 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이 플래카드 내용은 24년 후 완성차 업체에 피스톤링을 공급하는 유성기업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 요구로 재연된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이들이 든 피켓 구호 ‘아침에는 아침밥, 점심에는 점심밥, 밤에는 잠을 자자! 야간노동 철폐 정당하다’에 담겨 있다. 이들의 주장은 소박하지만 절실하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밤에 잠 좀 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경찰이 투입돼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론을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유도하고 공권력 투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 언론이다. 언론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조선·중앙·동아일보다. 이 신문들은 일란성 쌍생아처럼 한목소리로 파업을 비판하고 공권력 투입을 부추겼다. 여기서 어떤 기시감이 다가온다. 바로 24년 전 노동자 투쟁 때 목격한 바와 같이 친기업 반노동 일변도인 언론의 행태다.
세 신문은 충실하게 기업의 허접한 여론몰이용 숫자놀음에 호응했다. 먼저 현대·기아차가 파업 피해를 언급하면서 유성기업의 평균연봉이 생산직은 7015만원, 관리직은 6192만원이라고 공개했다. 이튿날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1인당 연봉 7000만원 받으며 파업, 불법 점거농성을 벌이는 것에 국민이 납득하겠느냐”고 말했다. 세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면서 옛날에 기초적인 사실확인조차 없이 기업의 주장을 받아 적었던 것처럼 유성기업 노조의 파업을 귀족노조의 배부른 파업으로 몰았다. 그러자 대통령은 고액연봉자의 불법 파업을 개탄했다. 그러나 이 연봉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었다. 연봉 말고도 생산차질 규모, 민노총 연계, 유성기업 3년 연속 적자 등이 침소봉대됐다.
이 일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 세 신문이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변함없이 반노동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이뤄진 민주화, 사회 제 분야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은 철칙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신문들이 재래시장과 중소상인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입장만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나아가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 편에만 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몹시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으로 구분해 철저히 기득권적 시각으로 보도하는 것, 필요하다면 여론조작을 불사해서라도 비기득권층을 기득권층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양극화 해소는커녕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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