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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변혁은 외부로부터 온다

가령 장기간 해외에 잠적해 있다 돌아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지난 10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된 정리해고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사자 간 합의를 무시한 외부세력들의 개입으로 정당하고 합법적인 경영활동이 힘들어진다”고 비판했다. 노사가 모처럼 경영정상화에 나서겠다는 데 김진숙, 희망버스 같은 외부세력이 끼어들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4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경향신문DB


필자는 조 회장이 이럴 걸 벌써 알고 있었다. 무슨 예견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문제가 터진 이래 회사 쪽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외부세력이다. 정치인도, 재계도, 언론도, ‘가스통 노인들’도 외부세력이란 유행가를 부른다.
한 신문은 “한진중공업 제3자들은 이제 빠져라”는, 다른 신문은 “조 회장이 수습 책임지고 외부세력은 손떼라”는 사설을 썼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게 이 외부세력 타령이니 그가 빌 게이츠 같이 철학이 있는 기업인이 아닌 다음에야 따라 부르는 게 정상이었을 것이다. 내일 국회 청문회에서도 필시 그와 여당의 ‘외부세력 하모니’가 나올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외부세력이란 개념이 몹시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무성에게 그것은 불순·불온세력, 좌파와 같은 말로 쓰이고, 가스통 노인들에게는 빨갱이와 동의어가 된다.
이는 외부세력이란 말이 법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한상대가 검찰총장 취임사에서 뜬금없이 종북좌익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법에도 없는 이념적, 정치적 용어를 사용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이 경우 모호한 종북좌익과의 전쟁이 이현령 비현령 식으로 자의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번 물어보자. 외부세력은 남의 노사분규에 개입해선 안되는가. 법률적으로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 우리 노동법상 외부세력과 관련된 법규는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다. 5공 때 신설된 이 조항은 세계 노동법에 유례가 없는 독소조항으로 비판받다 1997년 삭제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사건에 관여했다가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구시대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부세력이나 제3자 개입이 노사분규에서 빈번히 문제가 되는 것은 법개정이 불완전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노동자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는 조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노조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면서도 개입 요건 등을 매우 까다롭게 함으로써 노동자 측에 현저하게 불리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법규상의 맹점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외부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오랜 기간 왜곡된 제도와 법규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이 외부성을 일단 불온시하고 나아가 사갈시하는 데 길들어 있다. 이렇게 굳어진 인식은 문제에 대한 균형잡힌 접근을 방해한다.
엄밀히 말해 희망버스나 김진숙이 한진중공업의 노와 사가 아닌 그 외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외부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타자로서 배제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연대정신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반값 등록금 주장 대학생, 장애인, 평범한 시민들을 희망버스로 끌어모은 것은 연대의 정신이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남이 아닌 ‘우리 공통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다. 

그럼에도 끝없이 외부세력의 불순성을 강조하는 것은 체제단속 심리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외부세력의 침투를 철두철미 차단해 기득권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물리적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 기득권은 조금도 내놓지 않으면서 상생이니 공존이니 공생이니 해봐야 사기행각임이 금세 드러난다.
조 회장은 3년 이내에 회사를 정상화한 후 퇴직 노동자를 재고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수표로 판명날 공산이 크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때에도 회사 측은 점거농성을 해제하면서 해고자 재고용에 합의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단 한 명도 복직시키지 않았다. 그 사이 해고자 15명이 목숨을 끊었다.

외부세력 타령은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다 정말 외부세력에게 당하는 수가 있다. 혁명은 위기에 둔감한 그들의 외부로부터 온다. 4·19혁명,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도 부패한 구체제에 저항한 학생, 시민, 프롤레타리아 등 외부세력이 이룬 것이었다. 혁명은 내부에선 죽었다 깨도 안 온다. 내부로부터 안되니까 밖에서 들고 일어나는 거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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