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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위로다

한국적인 노래의 정체

 대중음악 종사자들, 싱어송라이터들 가운데 ‘한국적인 노래’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본다. 온 세상이 종횡으로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지 오래건만 이 ‘한국적인 노래’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노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는 과거 송창식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이 좋은 텍스트다.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긴 글에 생각해 볼 문제의식들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

   “(사이먼 앤 가펑클과 트윈폴리오를 비교하며)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듀엣을 이룬 점이나 해체 후에 솔로로 나선 폴 사이먼이 일종의 미국 민요인 록 포크송으로 성공한 데 비해 나는 국악을 바탕으로 노래한 점도 닮았다고 보여진다. …(1973년 7개월의 군대생활은 음악의 방향을 돌려놓은 중요한 시기였다.) TV를 통해 우연히 본 국악의 소리에서 이것이 진짜 내가 해야 할 음악임을 느꼈던 것이다. 왜 클래식이나 팝송에서 내가 만족감을 얻을 수 없었는지도 알게 됐다. 우리와 전혀 다른 배경에서 형성된 음악을 한국사람의 몸으로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또 시에 음악을 붙이는 가곡조의 노래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가창조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요 나의 노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만든 노래들이 <왜 불러>(1975) <새는>(1975·이정실 작사) <고래사냥>(1975) <그대 있음에>(1976·김남조 작사) 등이다.
 제대 후에는 일단 가수로서의 지명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한번쯤>(1974)을 불렀지만 그 이후엔 의식적으로 우리 노래를 부르려고 애썼다. 이런 노력은 트윈폴리오 시절 대중에게 남의 노래인 팝송만 들려준데 대한 죄갚음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트윈폴리오 시절의 노래는 대중으로부터 우리 음악을 멀어지게 한 ‘독약 같은 노래’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도 대학생들의 축제에는 빠지지 않고 출연하는 것도 그들에게 우리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스스로 반주하기 위해 국악기를 배우고 연습했다. …사람들은 내 노래가 국악과 접목됐다고 말들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접목’이란 없다. 접목은 근본이 비슷한 것끼리나 가능한 것이다. 가끔은 서양노래도 부르지만 내 음악의 기본은 국악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국악이 바탕에 깔린 노래보다는 서양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새는> <그대 있음에>보다는 <사랑이야>(1979) <우리는>(1983)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89년부터 광주 퇴촌면에 집을 짓고 있다며) 다시 시작할 나의 작업은 보다 우리의 몸에 맞는 우리 노래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날이 오면 내 성이 차는 연주자와 함께 두번째의 콘서트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주1】
 
 송창식이 ‘국악이 바탕에 깔린 노래’로 예시한 <새는>을 들어보자.

 

송창식의 <새는>

 

 새는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노래를 한다
 새는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자꾸만 날아간다
 먼 옛날 멀어도 아주 먼 옛날/ 내가 보았던
 당신의 초롱한 눈망울을 닮았구나/ 당신의 닫혀있는 마음을 닮았구나
 저기 저기 머나먼 하늘 끝까지 사라져 간다
 당신도 따라서 사라져 간다 멀어져 간다
 당신의 덧없는 마음도 사라져 간다…(하략)
                                       <새는> 가사

 

  송창식의 글을 읽으면서 맨 먼저 든 의문은 ‘지금도 같은 생각일까’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적인 노래’에 대해 상당히 급진적인 생각을 토로했다. 노래를 우리 것(국악)과 남의 것(서양노래)으로 나누고, 둘의 접목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추측컨대 이 글이 작성된 1992년 이후 본격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진행된 만큼 지금까지 이런 ‘과격’해 보이는 음악적 이분법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른 또 하나의 의문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다. 무엇이 한국적인 노래인가라는 부분이다. 송창식은 트윈폴리오 시절 부른 노래가 ‘독약 같은 노래’라고 극언을 했지만 ‘우리의 소리’나 ‘국악이 바탕에 깔린 노래’에 대해선 명확한 설명을 아끼고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한국적인 노래의 조건을 ‘음계·장단·가락·악기·창법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규정한 뒤 몇 뮤지션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중현에게는 한국 록의 대부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 땅에 록 음악을 본격적으로 이식한 뮤지션이 올해 78세인 신중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한데 그는 그저 서구 록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늘 한국적인 록 음악을 지향해왔다. <빗속의 여인>(1964) <미인>(1973) <아름다운 강산>(1975)이 그랬다. 그의 노래에는 한국인 특유의 선율이 짙게 배어 있다.【주2】한국적 선율의 증거로 제시되는 대표작이 우리의 다섯 음계로 작곡된 <미인>이다. 이 노래는 계속 반복되는 ‘라솔미레 도레미레도라/ 솔라도도 도도레도라솔’ 기타 리프가 강한 인상을 주는데, 이 선율이 바로 국악의 단조 5음계이다. 7음 가운데 라 도 레 미 솔만 쓰고 파와 시는 빠졌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5음계(펜타토닉 스케일)가 있는데 신중현이 <미인>에서 구사한 게 우리의 5음계란 얘기다. 반면 트로트의 경우 라 시 도 미 파, 즉 레와 솔은 빠지고 파와 시를 쓰는 일본 전통음계를 닮았기 때문에 왜색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신중현의 <미인>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나도 몰래 그 여인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모두 다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하략)                                   <미인> 가사

 

 국산 록과 국악풍의 음악을 추구한 뮤지션으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김수철이다. 그는 밴드 작은거인 시절 낸 2집(1981)에서 일찍이 국악가요라고 하는 <별리>를 만들어 불렀다.

 

김수철의 <별리>

 

 정주고 떠나시는 님 나를 두고 어데 가나/ 노을 빛 그 세월도 님 싣고 흐르는 물이로다
 마지못해 가라시면 아니 가지는 못하여도/ 말 없이 바라보다 님 울리고 나도 운다
 둘 곳 없는 마음에 가눌 수 없는 눈물이여/ 가시려는 내 님이야 짝 잃은 외기러기로세

 님을 향해 피던 꽃도 못내 서러워 떨어지면/ 지는 서산 해 바라보며 님 부르다 내가 운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구구만리 떨어진 곳/ 내 못가도 내 못가도 님을 살펴주소서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구구만리 떨어진 곳/ 내 못가도 내 못가도 님을 살펴주소서
                                                                          <별리> 가사

 

 국악가요란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창작 가요다. 주병선의 <칠갑산>(1980·조운파 작사 작곡)로부터 국악인 김영동의 <어디로 갈꺼나>(1982·김희창 작사, 김영동 작곡)까지 국악가요로 분류되는 스펙트럼은 넓은 편이다. <별리>는 ‘미미미 미미미미미/ 레미미미미레미 레’로 펼쳐지는 가락과 가사 내용, 타령조의 창법이 국악적이다. 제목은 한자로 別離인데, 이별과 같은 뜻이지만 가요 속의 통상적인 이별과는 다른 어감이다. 무슨 사연이길래 떠나시는 님을 보살펴달라고 하늘에 비는 건가. 별리의 아픔을 노래한 곡에서 우리의 대표적 전통민요 <아리랑>의 한이 느껴진다.

 이 곡은 훗날 김수철이 보여주는 ‘자기 전복적 변신’의 예고편이었다. 이런 표현을 쓴 건 그가 <못다 핀 꽃 한송이>(1984) <내일>(1979) 등을 통해 절정의 인기를 얻었음에도 “돈 안 되고 잘해봤자 본전이라는 국악”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김수철은 “음악에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양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심정을 회고했다.【주3】이 대목은 송창식이 기고문에서 보인 단호한 태도와 통한다. 이런 변신은 말이 쉽지, 실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음악이 이름도 낯선 ‘기타산조(散調)’다. 산조는 우리 국악의 대표적 기악 독주곡이다. 서민들의 애환과 사랑, 솔직한 감정을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진하게 토해내는 것이 판소리라면 산조는 악기 소리로 풀어놓는 것이라 하겠다. 한자말로 허튼 가락, 허드레 가락, 또는 흐드러진 가락이라는 뜻이다.【주4】산조에는 대금산조 가야금산조 아쟁산조 등 여러가지 산조가 있는데 기타산조는 서양 현대악기인 일렉트릭 기타로 우리 음악 산조를 연주하는 것이다.
 김수철은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에서 기타산조를 초연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또다시 갈고 다듬기를 거듭해 2002년 에너지 넘치는 ‘기타산조’ 음반을 출반했다. 그가 굳이 국악의 산조 형식을 빌려서 연주하는 까닭은 기타를 통해 젊은 세대와 세계인들이 우리 음악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주5】아시안게임 이듬해에는 중앙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를 통해 ‘기타산조’라 명명되었고 국악 창작집에도 수록된다.

 

김수철의 <장고와 기타산조> 연주


 ‘기타산조’ 음반에는 <장고와 기타산조> <대금과 기타산조> <가야금과 기타산조> <기타산조 솔로>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에서는 수록곡 가운데 <소통>이란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노래가 아닌 연주곡이지만 국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소양이 느껴진다. 아름답고 신명이 난다. 기타산조 솔로는 가야금 연주로 착각할 만한 소리를 낸다. 장고와 기타산조는 두 악기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데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피나는 노력 덕분일 거다. 김수철은 2008년 인터뷰에서 “작은거인 때부터 따지면 국악을 시도한 게 28년째”라며 “국악을 공부하다 보니 겉핥기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전문 국악인의) 사사 등을 받으며 정식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기타산조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며 “죽을 때까지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주6】열다섯 살에 천재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에 반해 기타에 빠졌다가 우리의 소리로 추구하는 세계를 바꾼 김수철이 앞으로 어떤 음악을 들려줄 건지 자못 궁금하다.

 

 이들 말고도 한국적 노래를 추구한 가수는 많다. 록 밴드 송골매도 신중현처럼 한국적 록을 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컬·기타리스트였던 배철수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나중에 가서야 내가 했던 음악이 한국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직선적인 록 음악이었구나라고 생각을 한 거지, 그걸 할 때는 그냥 우리끼리 모여서 대충 장난하듯이 한 거였다.” 그는 참 솔직하다. 그러면서도 “이제 우리 것을 만들어서 해야지, 외국 애들 그대로 흉내 내봐야 흉내밖에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주7】


 김태곤은 1970년대에 포크 음악에 국악을 접목한 <망부석>과 <송학사>(이상 1978)를 만들어 불렀다. “그의 음악은 가요라기보다는 국악이라고 해야 할 만큼 아주 토착적이다. 옷차림도 남달라 도포 차림에 삿갓을 쓰고 목에는 염주를 걸고 통기타를 치는 모습이 기인처럼 보였다. 망부석의 전주에 흐르는 꽹과리 소리는 드럼 비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송학사의 목탁과 피리소리도 뛰어난 조화를 이루었다.”【주8】그는 한의대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음악 치료사가 됐는데, 우리 땅에서 난 채소 과일처럼 음악도 국악이 우리 몸에 잘 맞는다고 역설하며 국악치료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다. 그는 이런 독특한 국악 건강론을 편다. “우리의 소리는 3박자 계통의 장단입니다. 선율구조가 곡선이지요. 서양 음악은 음과 음 사이가 3∼4도 이상 벌어지고 도약과 직선형태이지만 우리는 산 능선처럼 휘감아가는 나선형입니다. 아울러 강물의 흐름처럼 친환경적 유기농 음악이지요. 예를 들어 ‘에헤∼이∼요’라는 소리를 낼 때 머리에서 흉부와 복부, 대퇴부에 이르기까지 한꺼번에 넘나드는 호흡으로 곳곳에 자극을 주게 되는 원리입니다.”【주9】

 

 

김태곤의 <송학사>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 속 헤매냐
 밤벌레의 울음 계곡 별빛 곱게 내려 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 보세
 밤벌레의 울음 계속 별빛 곱게 내려 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 보세
   …(하략)                                     <송학사> 가사

 

 한국적 가락에 대한 관심은 정태춘도 뒤지지 않는다. 1978년 서정적 포크곡인 <시인의 마을> <촛불>로 데뷔해 인기를 얻은 그는 2집과 3집 앨범에서 국악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특히 1982년 3집 ‘우네’에선 가야금, 피리, 해금 등 국악반주를 본격 동원했다. 그러나 가요 팬들의 외면을 받아 흥행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에 국악을 담고자 하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90년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낸 비합법음반 ‘아, 대한민국…’(5집)에서 다시 국악을 끌어들인다. 사회·정치적 의식을 일깨우는 노래 <아, 대한민국…> <우리들의 죽음>과 함께 국악 사용이 두드러진 곡 <황토강으로>를 만들었다. 풍물패가 신나게 치는 꽹과리·징·장구·북 반주 소리를 듣다 보면 붉은 황토물에 함께 휩쓸려 흘러가는 기분이 든다. 정태춘은 이 즈음해서 대중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고무신을 신고 북을 치면서 노래하기도 했다.

 

정태춘의 <황토강으로>

 

 저 도랑을 타고 넘치는 황토물을 보라/ 쿨렁쿨렁 웅성거리며 쏟아져 내려간다
 물도랑이 좁다 여울목이 좁다/ 강으로 강으로 밀고 밀려 간다
 막아서는 가시덤불 가로막는 돌무더기/ 에라 이 물줄기를 당할까보냐 차고 차고 넘쳐 간다
 어여 가자 어여 가 구비구비 모였으니/ 큰 골짜기 마른 골짜기 소리 지르며 넘쳐 가자
 어여 가자 어여 가 성난 몸짓 함성으로/ 여기저기 썩은 웅덩이 쓸어버리며 넘쳐 가자
 가자 어서 가자 큰 강에도 비가 온다/ 가자 넘쳐 가자 황토강으로 어서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가자 넘쳐가자
 막아서는 가시덤불 가로막는 돌무더기/ 에라 이 물줄기를 당할까보냐 차고 차고 넘쳐 간다
 어여 가자 어여 가 쿠르릉 쾅쾅 산도 깬다/ 옛따 번쩍 천둥 번개에 먹장구름도 찢어진다
 어여 가자 어여 가 산 넘으니 강이로다/ 강바닥을 긁어 버리고 강둑 출렁 넘실대며
 가자 어서 가자 옛 쌓은 뚝방이 무너진다/ 가자 넘쳐 가자 황토강으로 어서 가자 
   …(하략)                            <황토강으로> 가사

 

 강산에는 <98 아리랑>(1998·강산에 작사 작곡)에서 국악계의 거목 이광수의 꽹과리 연주를 담는 등 국악에 상당한 애착이 있는 뮤지션이다. 로커이면서 <예럴랄라> <할아버지와 수박>(이상 1992) 같은 노래에서 보듯 작품세계가 향토적이다. 김창남 교수의 평이다. “사실 ‘한국적’이란 말만큼 애매모호한 말도 없지만 강산에의 록음악을 표현하는 데 ‘한국적’이란 수식어만큼 적실한 것도 찾기 어렵다. 그의 음악에는 분명하게 어떤 한국적 정신과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예컨대 ‘할아버지 그 하얀 수염 쓰다듬으시며 언제나 이웃 복덕방에 내기 장기 두러 나가셨지…’(<할아버지와 수박>), 혹은 ‘올해를 넘기면은 노총각 신세라고 시끄럽던 그 꺼벙이가 제일 먼저 장가가네/ 쾌지나칭칭 쾌지나칭칭 나네 얼싸좋네…’(<장가가는 날>) 같은 토속적인 몇몇 노랫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의 내면 풍경을 분명한 한국어로 또렷이 보여주고 있는 그의 노래 전반에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주10】

 

                                                      강산에

 강산에는 인터뷰에서 “한국음악의 전통적인 느낌이 늘 배어나온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 전통음악의 매력과 맛을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오히려 외국사람 하치를 통해서 알게 되고 우리 전통을 내 쪽으로 끌어와야 되는구나 하는 1차적인 생각부터 출발했다.…단순히 전통악기를 쓰면 된다는 개념도 아니고 전통 멜로디를 해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 답을 찾아나가는 거다. 그 맛을 어떻게 나스럽게 내 안에서 녹이는가는 내가 노력해야 하는 거다.…”(참고로 ‘하치’란 인물은 강산에와 오랫동안 레코딩 작업을 해온 일본인 프로듀서다)【주11】

 

 숱한 아티스트들이 말하는 한국적 노래, 그 개념이 뭔가. 좀 중구난방적인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다. 그 개념에 저마다 편차가 있는 듯 하다는 말이다. 배철수는 어떻게 하다 보니 한국적인 록을 한 게 됐다고 했고, 강산에도 외국사람을 통해 전통음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건 그런 솔직한 태도다. 여기서 더 나가 “모호한 부분에 대해 답을 찾아나가는 거”란 강산에의 자세도 마음에 든다. 고수(高手)연 하지 않는.

 백병동 서울음대 명예교수는 국악의 개념에 대해 다른 민족과의 문화적 교류 때문에 그 한계를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민족에게서 이입된 음악이라도 우리 민족의 정서로 동화되어 전해오는 것은 국악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서양 음악이 들어온 근대에 작곡된 음악들도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라면 국악의 영역에서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이다.【주12】그의 논지를 가요 분야로 좁혀 원용하면 일제 때 일본을 통해 들어와 정형화한 트로트도 국악은 아니지만 ‘우리 음악’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자의 노래에 한국적 정서가 듬뿍 담겨 있음을 인정한다면 왜색 시비는 더 이상 의미가 사라진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성찰해야 할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적 노래의 당위성이다. 왜 이 시대에 한국적 노래가 뭔지 물어야 하는 것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세계화 시대의 담론이 문화 예술에서도 통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좀 상투적이다. 답을 이 글의 제목 ‘한국적인 노래의 정체’에서 찾으련다. 정체(正體)는 곧 정체성, 아이덴티티이며 DNA다. 한국인이 부르는 노래가 다른 나라 사람의 노래와 같을 수 없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정체성과 DNA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주1】경향신문 1992년 12월 3일자 9면 나의 삶 나의 생각 ‘낯선 서양음악은 독약 같기만’ 제하 기사(송창식 기고)
【주2】레전드 100 아티스트(한권의책, 2013) 신중현 279쪽
【주3】같은 책 김수철 143쪽
【주4】이성재, 재미있는 우리 국악 이야기(서해문집, 2006) 108쪽
【주5】국립극장 발행 교양지 미르 2013년 7월호 ‘거장의 재발견’(이윤수 글)
【주6】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선, 2009) 197쪽
【주7】같은 책 302, 305쪽
【주8】선성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현암사, 2008) 241쪽
【주9】서울신문 2005년 9월 27일자 ‘국악치료 전도사 변신 망부석 가수 김태곤씨’ 기사
【주10】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선, 2008) 364~365쪽
【주11】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 422쪽
【주12】백병동, 대학 음악이론(현대음악출판사, 2007) 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