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잔인한 거다. 어째선가. 희망의 이름으로 현재의 고통을 유보하고 미래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럼 현재 진행 중인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서현이의 짧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도 그렇다. 지난 10월 ‘소풍을 가고 싶다’고 의붓엄마한테 말했다가 폭행을 당해 갈비뼈 16개가 부러지며 숨진 여덟 살 이서현양 말이다. 이 사건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시민단체들은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국회에선 아동학대 처벌을 강화하는 특례법 제정이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죽은 서현이는 돌아올 수 없다. 내가 희망은 잔인한 거라고 말한 이유다. 서현이는 파란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한 채 떠나 그저 계기로, 교훈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며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불쌍한 아이의 운명은 잊혀져 간다. 이 어찌 잔인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희망은 치유할 수 없는 질병, 불치병이다.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1941~2008)가 그랬다. 2002년 3월 이스라엘의 공격이 벌어지는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국제작가회의(IPW) 대표단 앞에서 그는 감동적 환영사를 했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해방과 독립에의 희망 말입니다.” 그는 희망들을 열거한다. 자식들이 안전하게 등교하는 희망, 임신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산 아이를 낳는 희망,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에 대한 희망….

 

 

덕수궁에서 정동길을 따라 걷다보면 캐나다 대사관 옆에 서 있는 수령 520년 회화나무를 만난다. 조금 더 가면 오른편으로 경향신문 건물이 나오. 정동길, 화화나무, 경향신문은 내 희망의 근거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사진은 窓雨의 블로그에서 빌렸다.



나라 없는 팔레스타인 시인에겐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잔인한 희망을 불치병처럼 앓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나는 올해 말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에 잠길 겨를이 없다. 그보다는 비탄의 애가(哀歌)를 부르고 싶다. 너무도 어두운 시대적 현실 때문이다. 오래 언론에 몸담은 자로서의 부채의식도 발동한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내 탓도 있다”는.

정치·경제·사회 상황은 절망적일 정도로 소통 불능,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대선에서의 부정을 비판하면 ‘대선 불복이냐’고 으름장을 놓고, 여차하면 종북으로 모는 일이 일상화한 시대다. 참으로 해괴한 제2 유신시대다. 지난 일요일 경찰이 경향신문사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진 것도 공교롭다. 경찰은 파업 중인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한다며 신문 제작 중인 사옥에 난입해 12시간 동안 건물을 휘젓고 다녔다. 이것이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반노동, 반언론, 반민주성을 압축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숨에 세월을 34년 전 YH사건 시대로 후퇴시켰다.

이튿날 박 대통령은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경제, 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며 철도파업 강경대응 방침을 재천명했다. 이 모습에서 ‘철의 여인’ 대처를 떠올린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독선과 소신을 혼동하는 꽉 막힌 대통령을 본다.

그는 일전에도 “정부에서 누차 민영화 안 한다고 발표했는데 민영화하지 말라고 파업하는 것은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민영화 논란을 떠나 말 자체가 웃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대선 때 한 경제민주화 등 공약들을 모조리 뒤집었다. 국민이 안 믿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래놓고 대화는 일절 거부한 채 믿으라 한다. 그걸 믿는 쪽이 바보다.

그가 엊그제 한 말 가운데 눈길이 가는 건 ‘미래’란 단어다. 희망도 미래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문법이 다른 듯하다. 이 불통 지도자가 희망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유신시절의 국민총화 같은 것일까. 또는 종북 척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건 국가적 재앙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을 바꿀 가망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정권의 태생적 유전자성과 기만성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럴수록 우리는 희망을 호출해야 한다. 잔인한 일이긴 하다. 엄혹한 정치현실에서도 소망스러운 정치, 살맛 나는 세상을 희망하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그러나 이 희망은 혼자 가는 게 아니다.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건 분노와 비판 그리고 연대다. 프랑스의 ‘낭만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92세에 쓴 책 <분노하라>에서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고 했다. 분노는 의당 비판을 부른다. 세상천지가 분노할 것, 비판할 것들이다. 비판을 멈춰선 안된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소통과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전통적 대자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결합해 서로의 안녕을 묻고 고민을 나누고 있다.

31년간 나를 품어준 정동 22번지 경향신문은 오래오래 내 희망의 근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동길 ‘방랑의 끝 나무’와 함께(캐나다 대사관 옆 520살 먹은 회화나무에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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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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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talgi21.khan.kr 딸기 2013.12.26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칼럼, 잘 읽었습니다!!!

  2. 쿨티 2013.12.27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년을 돌이켜보왔는데, 내적으론 많이 성장했는데, 회사에서는 크게 인정받지못했습니다. 어려운가운데에서 늘 희망을 가지고 1년을 보냈는데, 씁씁했습니다. 정말 현실은 바꾸기가 쉽지 않은것 같아요. 영화속 대사처럼"현실이 그렇게 말랑말랑한줄 아냐??"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해도 그것들은 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정답은 항상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희망이 하잖게 느껴고, 또한 마취약처럼 취하고 있는것이 아닌지 물어봅니다. 오늘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