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집권 2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필자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됐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국정 최고지도자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돌려야 한다고 본다. 예를 한 가지 들어 보자. 그는 일전에 충청도에 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하면 그 지역이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같은 자리에서 꺼낸 ‘강도론’에 묻혀 잊혀졌으나 음미해 봄직하다. 현직 대통령의 일그러진 정치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정치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이다. 정치를 업으로 하는 지도자가 정치적으로 판단·계산하고,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역 발전을 막는다는 말이 그렇다. 정치는 나쁜 것이란 사회통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도리어 지도자에게 주도면밀하게 정치적인 것은 덕목이다. 그래야 균형감각을 갖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다. 그는 이날도 ‘경제적 사고’를 강조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른바 최고경영자(CEO)형 대통령이란 것의 허상을 우리는 낱낱이 목격하고 있다.
현정부 2년동안 정치 혐오 확산
둘째, 그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흔하디 흔한 인식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통념은 정략과 권모술수, 야합, 배신 따위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정치적임’에 대한 그의 비판은 세종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세종시와 관련된 전 과정에서 정치인 이명박의 처신이 얼마나 정치적·정치공학적이었는지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엊그젠 청와대가 친박계 의원들에 대한 뒷조사를 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그는 세종시 수정이 정치적이 아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결단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적이 아니란 말 자체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정치에 대한 대통령의 이 같은 언어·인식혼란은 전염성이 높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를 증명했다. 그는 며칠 전 기자간담회에서 문화예술위원회의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를 두고 “이런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려고 하면 절대 안 풀린다. 좌와 우, 혹은 진보다 보수다라는 식으로 문화예술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도 로맨스, 불륜 이분법이 유효하다. 충직한 문화부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이유를 알 듯하다.
그러나 정작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는 이런 전염력이 국민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를 사갈시(蛇蝎視)하는 풍토가 만연되는 것은 정치가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치명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명박 정권이 흉중에 품은 노림수일 것이다. 환멸스러운 정치행태를 통해, 그리고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 확산을 통해 국민을 정치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국민은 조종과 기만, 공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서울 노원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경향신문DB
정치에 대한 불신·환멸 확산은 선거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노동운동가 손낙구씨가 최근 낸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철저히 계급·계층투표를 한다. ‘계급배반투표’, 즉 서민층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 투표를 한다는 가설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그러나 차이는 투표율에서 났다. 부자 아파트 동네는 열심히 한나라당에 투표했다. 반면 가난한 동네는 민주당을 찍었지만 투표율이 낮았다.
투표율 차이는 생활수준 차이에서 비롯됐다. 쉽게 말해 민생고에 찌든 서민들의 투표율은 낮다. 지난 설 민심 르포에서 대구의 50대 택시기사는 “(지방선거) 투표 안 할낍니다. 그 시간에 잠이나 잘랍니다”라고 했다. 2004년 총선 투표율은 60.6%였는데 2008년엔 14.5%포인트 떨어진 46.1%였다. 민주화 이후 투표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국민이 조종 대상으로 전락 우려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 속에서 많은 국민이 고달프다. 정치적으로 깨어 있기는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투표 불참과 정치소외가 초래할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때론 땅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마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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