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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전근대적인, 너무나 전근대적인

‘스폰서 검사’ 사건은 비정상적인 사건이다. 비정상적인 사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천안함 사건은 안보불안을 야기한 비정상적 사건이다. 스폰서 검사 사건은 그 전근대성이 몹시 돋보이는 비정상적 사건이다. 쉽게 말해 이런 추문은 근대화하기 훨씬 전 옛날 옛적에나 들어보았음직한 것이란 뜻이다.

검사들의 향응 및 성 접대 파문을 조사할 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춘향전>에서 장원급제해 암행어사가 돼 내려온 이몽룡은 남원부사 변학도의 학정을 이런 한시로 풍자한다.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촉루락시 민루락 가성고처 원성고).” 뜻은 “금 술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 촛물 흐를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다.

스폰서 사건이 터지자 공무원 부패를 비판할 때 즐겨 인용되던 이 시가 한 네티즌의 글에 등장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치세가 조선말기 ‘삼정의 문란’보다 못할 게 없는 부정과 부패의 극치”라고 탄식한다.

과연 이 시는 이번 사건에도 잘 들어 맞는다. 그것도 중층적 의미로. 사또 변학도가 즐긴 금준미주와 옥반가효는 수세기 시간여행을 해 검사들의 폭탄주와 안주로 변신했다. 그것이 종국적으로 누구 한숨의 대가인지도 불문가지다. 그들이 고시에 붙어 검사가 됐을 땐 암행어사 기분이 들었을 법하다. 하지만 스폰서가 제공한 주지육림에 흡족해 하는 검사 영감의 기름진 얼굴에는 어느새 탐관오리 변학도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스폰서 검사’와 탐관오리 변학도

사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전근대성이다. 업자와의 유착, 뇌물, 공사 혼동, 권력남용, 조직이기, 윤리적 타락, 거짓말, 오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정반대인 행태 등이 그것이다. 이를 후진성보다 전근대성으로 규정하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이유가 있다. 한국은 겉으로는 후진국을 탈피한 지 오래다. 가령 아프리카의 후진국 짐바브웨와 비교해 한국은 소득, 인권, 민주화 등 모든 면에서 선진적이다. 비교 자체가 웃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보면 작금 한국의 인권, 민주화 퇴행 수준이나 짐바브웨나 거기서 거기다. 이를 입증한 것이 검찰의 전근대성이다. 전근대성의 주요 특질 중 하나가 연고주의, 지역주의다. 합리주의 같은 근대적 가치는 쓸 데 없다. 스폰서에게 ‘이심전심의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강요하는 검사의 심리에 깔린 게 연고주의다.

그 동안 불거진 검찰의 추문들이 단편 흑백영화였다면 스폰서 정모씨의 폭로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급이다. 그러나 검찰은 그 압권을 보여주었을 뿐 전근대성의 양태는 널려 있다. 우리를 전근대성의 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붙잡는 또 하나의 중대 요인은 색깔론이다. 목하 천안함 정국에서 보수파가 드러내는 극우적 광기도 색깔론의 연장이다.

박노자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확증도 없이 북한개입 혐의를 부풀리고 보복을 외치는 것은 용의자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난다. 이 원칙은 근대국가에 와서 확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덮어놓고 ‘유죄추정’부터 하는 것은 비이성적, 전근대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침몰사고와 ‘좌파 집권 10년’을 연결짓는 견강부회도 그렇다.

‘삼정의 문란’보다 더한 부패

이 정권 들어 선진화 구호가 요란하다. 그러나 나는 선진화보다는 근대화가 먼저라고 주장하고 싶다. 일에는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 주요 부문마다 전근대성이 도사리고 있는 판에 그걸 뛰어 넘어 선진화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번에 검찰이 온몸으로 이를 증명했다.

우리 안에 고착된 전근대성을 외면한 채 G20 정상회의, 핵정상회의를 열면 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그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식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근대화 과정의 파행성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버젓이 횡행하는 현실을 볼 때 그렇다.

사족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스폰서 사건에 대해 “과거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이라며 재발 방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혹시 검찰에 대한 그의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게 아닌가 한다. ‘견찰(犬察)’이란 게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뒤돌아서 주인을 물어뜯는 존재임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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