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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진보가 이겼나

6월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의 어느날 필자는 최루탄 연기 자욱한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를 취재하다 경찰 ‘사과탄’ 파편을 등에 맞아 다친 일이 있다. 근처 의료봉사대 대학생의 치료를 받은 기억이 목이 터져라 외치던 시위대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와 함께 지금도 생생하다.

2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지난주엔 지방선거가 치러져 이명박 정권이 참패했다. 야당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정권이 민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심판이었나. 그 중심에 4대강, 세종시, 천안함 사건 등이 있다.
소통을 무시한 채 마구 밀어붙인 것이 역풍을 불렀다. 독재시절 물리도록 겪었던 ‘북풍’ 메뉴까지 대대적으로 동원됐지만 먹히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그간 이룬 민주화의 성과를 무시하고 마구 역주행한 것이 끝내 심판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이 심판이 한 번 하고 끝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란 사실이다. 토건·신자유주의·극우가 뒤섞인 이 정권은 겉으론 쇄신 흉내를 내면서 일대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칙상 분명하다. 이는 분노한 촛불 앞에서 반성한다고 해놓고 2년 뒤 분위기를 살펴 말을 일거에 뒤집어버린 이명박 대통령이 잘 보여주었다. 잘못된 정권에 대한 심판이 지방선거 같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선 안되는 이유다.
물론 지방선거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다. 야당들이 극우 신문들까지 가세해 구축한 철옹성 같은 장벽의 한 귀퉁이를 허물었다는 것은 값진 성과다. 하지만 몇가지 이유에서 그 평가는 엄밀해야 하고, 따라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초선의원들이 지방선거 패배에 따른 쇄신방안 발언을 듣고 있다.


북풍의 선거 영향 예상보다 적어

이번 선거에서는 우려했던 것만큼 안보논리가 힘을 쓰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그나마 천안함, 곧 북풍 덕에 살아남았다는 견해도 일부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안 본다.
여든 야든 북풍이 이렇게 선거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국 사회가 앞으로 안보논리 내지 색깔론에 휘둘릴 가능성이 상존해 있음의 방증이기도 하다. 천안함 사건 이후 일부 신문들의 비이성적·호전적 보도행태는 우리에게 극우논리의 토양과 토대가 엄존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정권에 와서 민주화의 성과가 걷잡을 수 없이 뒷걸음질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그만큼 허약체질이란 뜻도 된다. 극우·토건정권이 경제살리기란 구호를 외치며 들어와 양극화에 전력투구하도록 만든 것은 20여년간 이룩한 우리 민주주의의 허약성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안보논리나 허약한 민주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진보 수준이다. 이번 선거 역시 이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선거에서 극우논리가 안 먹혔다는 것은 사회적 의식수준의 향상이자 진보로 긍정 평가할 수 있다. 지역투표가 완화되고 경남에서 노동자들이 계급투표 성향을 보인 것도 진보적 변화다. 이명박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교육감 후보들이 모두 진보 후보를 표방한 것도 특이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물어야 할 것은 한국 진보정당·정치의 현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이 거둔 성적은 어떤가.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민주노동당은 야권연대의 덕을 조금 보았지만 단독 완주를 선택한 진보신당 후보들은 좋은 결과를 못 얻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3위를 한 당대표 노회찬 후보에게는 근소한 표 차로 패한 한명숙 민주당 후보 진영 등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극우논리 안 먹힌것 진보적 변화

하지만 이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비난이다. 이번 선거에 반 이명박 말고도 달리 추구할 목표와 가치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진보신당이 완주한 것은 진보정치의 대의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결코 진보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보신당은 현 정권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반노동정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흔히 이들 정권에 민주, 개혁, 서민 심지어 진보 등의 수식어를 붙이곤 하지만 이는 정명(正名)과는 거리가 있다. 극우세력들이 집요하게 좌파 딱지를 붙인 것 때문에 생긴 착각일 것이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키워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국정치는 계속 ‘그 밥에 그 나물’ 양상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여, ‘진보가 이겼나’란 질문에 대한 답은 유보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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