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에게 소박한 충고를 하나 하고 싶다. ‘보수신문’으로 불리는 조선·중앙·동아일보를 절대적으로 믿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부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일화를 소개한다.
1815년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섬을 탈출했다. 당시 최대 일간지 ‘르 모니퇴르’는 ‘식인귀, 소굴을 빠져나가다’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후 2주 동안 이 신문의 헤드라인 변화가 볼 만했다. 나폴레옹이 북상함에 따라 그 호칭은 아귀→호랑이→괴물→폭군→약탈자→보나파르트→나폴레옹→황제 보나파르트로 바뀌었다. 마침내 파리에 입성한 그에게는 ‘높고도 귀하신 황제 폐하’란 극존칭이 붙여졌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얼마든지 그 역도 성립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폴레옹은 극단적 사례일 뿐 권력의 이동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건 언론의 생리처럼 여겨져왔다. 권세가 떠나가면 언론도 떠난다. 은퇴한 정치인들이 가장 힘든 게 세간에서 잊혀져 버린 느낌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은 설마,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조·중·동’이 언제 비수를 들이댈지 모른다. 눈깜짝 안 하고 박근혜 의원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칼럼에서 그런 낌새가 보인다. 그는 작년 말 ‘세종시, 진인사(盡人事)의 길로 가야’란 글에서 “이 대통령은 ‘최선을 다했음’에 자족하고 ‘어쩔 수 없음’으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며 사실상 세종시 수정 포기를 주문했다. 김 고문은 지난달에도 ‘실용의 정치’를 거론하며 다시 대통령이 (박 의원에게) 양보할 것을 권했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정권 재창출이었다.

대의와 가치가 빠진 세종시 논리

경험칙상 이런 유의 권유는 양다리 걸치기와 종용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현직 권력자에게 충언도 하면서 차기 대권주자 박근혜에게 보험도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용의 정치를 하란 충언이 언제 종용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정권 재창출이 위태롭다는 데도 세종시로 분열할 거냐는 질문엔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말을 바꿔 타버릴 것 같은 기세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구도에는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다. 수도권 집중 해소, 지방균형발전이라는 행정복합도시의 대의다. 조·중·동의 세종시 논리에는 이 대의와 가치가 실종돼 있다. 있대야 구색갖추기 수준이다. 온통 정부의 비효율성 강조뿐이다. 그건 수도권 포퓰리즘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거기에 김 고문류의 정권 재창출론이 가세하는 정도다. 이런 마당에 어제 청주에 간 이 대통령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고 했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조·중·동이 더욱 사익(私益) 추구에 빠져들고 있다고 본다. 사익이란 렌즈를 통해 보면 이들이 좇는 지향점들이 쉽게 설명된다. 때는 고통스러운 민주화를 거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이 넘실대는 시대다. 권력이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은 옛이야기로 치부된다. 이젠 자본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일각에서 독재 시대 역행 운운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다. 불평분자, 좌파들의 선동이기 십상이다. 지난 10년 ‘좌파정권’의 상흔이 이토록 짙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사양산업인 신문의 대안으로서 종합편성채널 사업은 좋은 돌파구다. 일단은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원전 수출은 이명박 찬가를 부를 좋은 기회였다….

정말로 민주화 시대는 끝났는가

사익추구 자체가 죄악일 순 없다. 언론도 기업인 만치 공익성만 강요해선 안된다. 문제는 그 정도다. 언론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법도, 규범이란 게 있다. 자신의 이념정향이 설사 극우라고 해도 조금만 왼쪽에 있어도 좌파라고 규정하고 색깔론을 들먹이는 것은 후진사회의 모습이다. 사회에서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빨갱이 주장이 면면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 이들의 색깔론에 힘입었다고 본다.
비판이란 언론의 본령은 때와 장소를 초월한다고 믿는다. 언론은 산 정권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묻고 싶다. 정말로 민주화 시대는 끝났나. 중앙, 동아는 민주화에 공헌한 그들의 과거를 역사로서만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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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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