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가 ‘맹호들은 간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2)-1절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1964~1973년의 일로, 32만명이 파병돼 5100명이 전사했다. 2만명이 고엽제 피해로 고통받기도 했다. 참전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자금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금 등을 지원 받았다. ‘미국 용병’ 시비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이나 이 글 주제와 상관없는 것이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개인적 기억 몇 마디 하겠다. 나는 서울 서대문국민학교 출신인데 이 노래를 학교 운동장 등나무 스탠드에서 신나게 합창한 게 기억난다. 학교 주소는 중구 정동 28번지이다. 유호가 작사하고 이희목이 작곡한 이 노래가 나온 건 1966년으로,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었다. (1970년 졸업한 뒤 1982년 그 바로 옆 정동 22번지 경향신문에 들어가 31년간 근무하다 퇴직했다. 정동과 나는 질긴 인연이 있지 않았나 한다. 서대문 국교가 1973년 폐교되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게 창덕여중이다.)
각설하고, 본론인 ‘카츄샤’와 ‘민들레 홀씨되어’ 이야기로 들어가자. 먼저 ‘카츄샤’ 노래를, 다음엔 ‘민들레 홀씨되어’를 들어보자.
특이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노래 다 가사에 ‘강둑’이란 말이 나온다.
‘카츄샤’ 가사 1절은 이렇다.
Расцветали яблони и груши,
사과꽃 배꽃이 피었지
Поплыли туманы над рекой.
구름은 강 위를 흘러가네
Выходила на берег Катюша,
카츄사는 강둑으로 나와
На высокий берег на крутой.
높고 가파른 강둑을 걸어가네
참고로 ‘강변도로-набережная(나베레쥐나야)’는 берег(베레크-강둑)에서 파생한 말이다.
‘민들레 홀씨되어’ 가사는 이렇다.
달빛 부서지는 강둑에 홀로 앉아있네
소리 없이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가슴을 애이며 밀려오는 그리움 그리움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산등성이의 해질녘은 너무나 아름다웠었지
그 님의 두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2
강둑 있는 풍경
노래 리듬은 정반대다. ‘카츄샤’는 em단조, 또는 이보다 5도 낮은 am단조로 연주하지만 이례적으로 군가로 전용될 만큼 빠르고 경쾌한 행진곡풍 4분의 2박자 곡이다. ‘라시도라 도도시라시 시도레도 레레도시라…’ 노래는 이런 곡조로 시작한다.
1938년 작사는 미하일 이사코브스키가, 작곡은 마트베이 블란쩨르가 했다. 가사 3·4절에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와 ‘그가 조국을 지키게 해주세요’란 가사가 나온다. 이게 주인공 여자 카츄샤가 멀리 떠나있는 군대 간 애인에게 보내는 노래임을 추측케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나온 지 3년이 지난 1941년 ‘대조국 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 발발하면서 그 시대 대표적인 군가로 떠오르게 된다. 그 뒤로도 오늘날까지 러시아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통상 제2차세계대전이 터진 날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한 1939년 9월 1일로 보지만, 러시아는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 대조국 전쟁 개전일(1941년 6월 22일)을 ‘독소전쟁 발발일’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거 말고도 ‘민들레 홀씨되어’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르다. 느린 4분의4박자, 라D장조(또는 C장조)로, 군가로 불리게 된 ‘카츄샤’와 분위기가 구별된다. 두 노래 다 서정적, 낭만적인 건 사실이지만 가사를 보면 ‘카츄샤’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과는 달리 ‘민들레 홀씨되어’는 과거 지극했던 사랑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하고 들어야 제맛이 난다.
1985년 여름 춘천 남이섬에서 개최된 제6회 MBC강변가요제에서 서울예대 국악과 1학년이던 박미경이 불러 장려상(동상)을 받았다. (그때 대상을 수상한 노래가 이선희의 ‘J에게’였다.) 발표 당시에는 작사·작곡자가 무명인인 김정신으로 알려졌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유명 작곡가 이범희가 본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작은 파문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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