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가 ‘물리적 거리두기’를 또 무시하고 지난 일요일 부활절 예배를 강행했다. 서울시의 집회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는 이날까지 3주째였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서울 6400여개 교회 중 12일 현장예배를 한 곳은 2100여개(32.8%)로 앞주에 비해 10% 이상 늘었다. 당연히 코로나19 감소세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절반 가까운 교회가 이날 예배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는 간략하게 예배를 진행하고 신자 사이 2m 간격을 유지했으며 시간대를 나눠 신도들을 분산하는 등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애쓰는 모습이었다.
교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서울 종로구 ㅅ교회의 60대 신자는 코로나19 감염 우려에 대해 “교회가 사회보다 100배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장이나 카페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지 않나. 교회는 방역을 철저하게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들 그 생각에 공감할지는 논외로, 이 신자 개인의 소신 내지 신심은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숭미의식과 뗄 수 없는 보수 교단
그러나 별개로 다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지나치게 보수화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당초 이 칼럼 주제를 ‘신앙과 독선의 차이’로 잡았던 이유다. 그러면 언급할 거리가 상당히 많다. 보수층 가운데서도 ‘숭미(崇美)의 염’을 가장 진솔하게 보이는 곳이 보수 기독교단이다.
각양각색 부활절 예배 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이 교회 진입로를 막은 채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위 사진). 이날 서초구 온누리교회에선 교인들이 차량에 탑승한 채 예배를 드렸고(가운데), 경기 성남시 분당소망교회는 교인들 사진을 의자에 놓고 온라인 예배를 진행했다. 경향신문 김기남 기자·연합뉴스
2002년 월드컵 와중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 여중생 사건으로 추모 촛불집회가 잇따랐다. 그러자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구국기도회를 열어 반미를 규탄하고 미군철수 반대를 외쳤다. 당시 김 모 목사는 “외신기자들과 부시 대통령과 미국 상하원 의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자”라며 기도를 영어로 했다. 한참 지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영어기도’ 심리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당초 생각한 주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숭미의식을 뒤집어보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나온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색깔론이다.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의 한 교회에서는 일부 신도들이 용인시가 설치한 집회금지 현수막을 탈취하며 공무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교회 목사는 “좌파들이 용역을 동원해 부활절 예배를 방해하려 한다”며 ‘종교탄압’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수감 중인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도 평소 색깔론을 휘둘렀다. 그는 지난해 6월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공조해서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려 한다고 의심되는 행동을 한다”며 색깔론을 폈다.
일부 극단적 목사의 견해라며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말라는 반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반복되면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게 색깔론의 생리다. 기독교 신자인 필자의 한 지인도 그런 경우다. 전문직 종사자인 그는 평소 상당히 균형잡힌 사고를 보이다가도 좌파나 빨갱이 이야기만 나오면 단순논리로 돌변하곤 한다.
이것도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숭미·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력과 떼어내 생각하기 어렵다. 나름의 역사적 근거가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싸운 혈맹이자 유일한 동맹국이다. 복음을 전해준 은혜의 나라이며, 일제에서 구해준 해방자의 나라다. 또 전후 굶주린 고아·난민을 도와준 구호의 나라로 개신교인들의 의식에 각인돼 있다. 그런 의식구조는 가령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9·11테러 뒤 드러낸 극단적 선악 이분법과 친연성이 강하다. 보수 기독교계의 경직된 세계인식틀과 통하는데, 이를 극단화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구호가 된다.
세상의 모순 외면 않는 게 종교
종교는 개인적 참회와 성찰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지 말고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게 신의 뜻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 길이다. 평생 교회 종지기로, 병고에다 빈한한 삶을 살다 간 동화작가 권정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교인다운 티를 안 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약자들의 운명을 향해 열려 있었다.
2020-04-14 12:37:0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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