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자유한국당은 보수정당이다. 당 강령에도 명시돼 있다. 강령에는 “산업화의 주역인 보수정당으로서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성장 전략을 모색한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시대정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변화하고 개혁하는 정의로운 보수를 지향한다”고 돼 있다.
보수란 무엇인가. 급격한 변화를 반대하고 도덕과 전통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이다. 변화를 무조건 거부한다는 뜻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수구(守舊)라 한다. 한국당 강령도 이 점을 의식한 듯하다. 자신을 보수정당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변화와 개혁이란 조건을 달았다. 스스로도 보수와 수구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꼴통보수’가 아니란 것이다.
자유한국당 3선인 김세연 의원이 17일 국회 정론관에서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한국당 해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는 건 맞지만 필요할 땐 담대한 개혁에 나서는 게 진정한 보수다. 링컨, 비스마르크, 처칠, 드골 등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보수 정치인들이 그랬다. 그런데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말이 역시 맞는 것 같다. 지금 돌아가는 한국당 분위기가 ‘개혁적 보수’와는 영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김세연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뒤 나온 당내 반응을 보면 그렇다. 최근 김 의원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당 지도부는 물론 의원 전체가 총사퇴하고 당을 해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당은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 “생명력을 잃은 좀비 같은 존재”라는 말도 했다. 그는 “한국당은 수명을 다했다. 이 당으로는 대선 승리는커녕 총선 승리도 이뤄낼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수구화한 한국당의 한계를 엄중히 평가하고 기득권 포기를 통한 보수의 혁신을 주문한 것이다. 현 지도부와 의원들이 물러나고 다음 세대가 전면에 나서 새로운 정신을 갖춘, 진정한 보수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는 “총선에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는 말로 응답했다. 물러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 게 단식 농성이었다.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라 있는 선거법과 검찰개혁법을 철회하란 요구다. 본인이야 비장하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뜬금없는 데다 기득권 지키기로 비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7일 단식 농성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홈페이지
의원들도 대다수가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A 의원은 “불출마는 (재력가인) 김 의원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가만있는 다선 의원들이 무슨 죄냐”라고 말했다. B 의원은 “새 집을 짓자며 떠났다 돌아온 사람이 집에 불을 지르고 있다”고 했고, C 의원은 “불출마 선언해놓고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장직은 왜 유지하느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내 몇 안 되는 소장 개혁파인 김 의원은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김 의원은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당이 극단적으로 우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며 “중도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중간 투표자를 안을 수 있어야 집권이 가능하다”며 “건전한 보수정당으로서 철학과 이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금 한국당은 꼰대정당이란 이미지만 남아있다”고도 했다.
통계상 그것도 사실이다. 한국당 의원 108명 중 60세 이상이 59명으로 54.6%나 된다. 반면 20대는 없고, 30대는 신보라 의원 하나이며, 40대도 김세연 김성원 전희경 의원 3명에 불과하다. 전국 유권자 4307만 명 가운데 2040대는 53.7%에 달한다. 그런데 한국당 2040대 의원은 4명으로 3.7%에 그친다. ‘늙은 한국당’은 2040세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에서 20대의 한국당 지지율은 11%, 30대는 12%, 40대는 13%였다. 민주당은 20대 40%, 30대 46%, 40대 51%로 큰 차이가 난다.
한국당에 시대착오적 색깔론이 온존하고 있는 이유도 당의 노쇠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 오랫동안 계속돼 온 계파갈등과 그로 인한 ‘계파학살’로 한국당은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못하는 획일적 정당이 됐다. 다양성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다. 그런 상황은 외부 반대 세력을 너무 쉽게 종북으로, 빨갱이로 몰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정권 성격에 따라 진보적 경제정책과 유화적 대북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당에서는 이게 거두절미하고 종북 좌파 정책이 돼버린다. 색깔론 의존이 병적으로 체질화한 탓이다. 손쉬운 색깔론을 놔두고 무엇 하러 돌아가느냐는 생각에 젖어있다.
김세연 의원은 모처럼 보수파에게 벼락치듯 울리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찻잔 속 태풍’으로 소멸할 듯하다. 한국당 쇄신은 물 건너갔으며, 색깔론 등 냉전적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란 의미다. 2019.11.2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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