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객닷컴

[논객닷컴] 촌지의 추억

그러니까 정확히 이십년 전, 필자가 모스크바 특파원을 하고 있을 때다. 그해 9월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에게서 한국 특파원들과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식당에서 이 그룹이 당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벌이고 있는 가스전 개발 사업이 크게 진척되고 있다는 등의 설명을 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정 총회장이 선물이라며 비닐로 된 ‘빠껫(꾸러미)’을 내밀었다. 특파원단 간사를 맡고 있던 필자가 받았다.

 

 

©픽사베이

 

자리가 파한 뒤 ‘빠껫’을 열어보고 놀랐다. 선물이란 게 돈 봉투였는데, 한 명당 3000달러씩이었다. 당시 환율로도 250만원 돈이었다. 거마비든 촌지든 어떤 명분으로도 통상적인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다. 정 총회장이 평소 남들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로비 자금을 뿌린다더니, 명불허전이었다. 부랴부랴 타사 특파원들과 의논을 거친 뒤 봉투를 반려했다. 일부 반대가 있었으나 다수는 ‘받지 말자’였다. “이러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한보 관계자에게는 “저녁에 술이나 거하게 사라”는 말로 무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도긴개긴이었지만, 그땐 ‘완충적’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그 이듬해 1월 한보는 부도사태를 맞았고 정 총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1991년 수서지구 특혜분양 사건으로 인한 구속 등에 이어 세 번째였다. 가스전 개발 사업은 유야무야 됐다. 국회 청문회에서는 한보가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들에게 돈을 뿌렸다는 증언이 나왔고, 검찰 주변에선 수뢰 언론인 리스트도 돌았다.

 

각설하고 시계를 현재로 되돌리자. 만약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발효된 상황에서 3000달러를 받았다면 어떻게 될까. 빼도 박도 못할 범죄다. (김영란법은 ‘범죄’란 용어는 피했지만, 사실상 그렇다.) 금품 수수 금지 조항에서도 가장 세게 걸린다. ‘1회에 100만원 또는 매 회계연도에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은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벌칙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돈을 준 측도 똑같은 처벌을 받는다.

 

지난달 말 헌법재판소가 김영란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법은 얼마 뒤 시행되게 됐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을 법 적용 대상에 넣은 것에 대해 헌재는 ‘문제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기자협회는 “권력이 김영란법을 빌미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릴 가능성을 경계한다”고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기우일 뿐이니 염려 붙들어 매라는 말은 못하겠다. 이 시대의 언론 상황이 민주주의 후퇴와 더불어 아주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의 비판언론 재갈물리기는 상존해 있다.

 

 

©픽사베이

 

따라서 그건 그것대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그렇지만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은 김영란법의 본질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이 법은 ‘부패공화국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OECD 최하위권의 부패인식지수·국가청렴도를 5년째 지키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필자는 20년 전 일을 회상했지만 지금도 그때에 비해 별로 나아진 건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 부패구조를 떠받드는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다. 따라서 민간영역의 언론이 공공기관 취급을 받게 된 것을 억울해만 할 게 아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 문제를 똑바로 못 본 채 ‘비판언론 재갈물리기’만 강조하는 것은 견지망월(見指忘月)일 뿐이다.

 

김영란법의 특징은 직무관련성이나 대가성을 안 따지고 부정청탁·금품수수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게 기존 형법상의 뇌물죄와 다르다. 관행이나 미풍양속으로 여겨졌던 스폰서, 떡값, 전별금 등 대가와 관계없는 경우에도 감시망을 가동했다. 우리 사회에 과도한 접대문화가 형성된 것도, 향응이 당장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이 없더라도 장차 도움 받을 일이 있을 것이란 ‘보험심리’의 소산일 터다.

 

내 모스크바 촌지의 추억도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과는 상관없었던 것 같다. 무슨 기사 한 줄을 잘 써주는 조건이라기보다는, 우호를 다지기 위한 의례적 ‘기름칠’이었다고 할까. 이게 가능했던 건 거대한 부패구조 속에서 ‘적은 돈 놓고 큰 돈 먹기’ 도박이 톡톡한 재미를 안겼기 때문이다. 가령 한보처럼 수십억 원을 로비 자금으로 팍팍 써서 은행에서 수조 원을 특혜·부정 대출 받는다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니까.

 

현대경제연구원은 2012년 ‘부패와 경제성장:부패만 해소돼도 잠재성장률 수준 회복’이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가 OECD 평균 수준만큼만 부패가 해소되면 1인당 GDP가 138.5달러(약 15만원) 증가하고 성장률로는 0.65%포인트 상승한다”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부패를 걷어내는 작업은 결코 경제성장과 반대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이다.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항간에서 ‘기레기’ 소리를 들어온 언론이 나설 필요가 있다. [논객닷컴=김철웅]

 

2016.08.05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