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거센 사임 압력을 받은 닉슨 대통령이 TV에 나와 연설을 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할 때 미국은 후세인이 9·11테러를 배후 지원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전했으나 거짓말로 밝혀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진실’은 그냥 튕겨나가 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후세인과 알카에다가 같은 것이고, 전쟁에서 싸워 조국을 테러리즘에서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프레임’을 지니고 있고 그 프레임에 맞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부시는 이듬해 거뜬히 재선에 성공했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2004)에서 예시한 프레임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프레임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설명한다. 잘 안 와닿는다. 그보다는 생각의 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생각의 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다. 언어를 통해 의제를 선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민주당 편인 그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란 제목을 쓴 이유가 있다.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 즉 경쟁자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해 줄 뿐이다. 선거에서 그렇게 상대의 의제에 말려들면 백전백패란 뜻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8일 연평도를 전격 방문해 "북방한계선(NLL)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흡사 새누리당의 'NLL 프레임' 구축에 맞장구라도 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새누리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8일 이 문제가 불거진 뒤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밝혔는데도 그렇다. 국정조사도 하고 회담 대화록도 열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대화록은 국가기밀사항이다. 대화록부터 보자고 고집할 게 아니라 의혹을 제기한 쪽에서 먼저 근거를 제시하는 게 순서임에도 막무가내다.
한데 안보 무능력을 한껏 노출해온 새누리당이 갑자기 ‘NLL 사수’란 사명감에 불타 이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뭔가 구리니까’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반대한다는 의혹을 유포하려는 속셈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색다른 안보 프레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NLL을 끌어들인 건데 그 효과는 글쎄다. 레이코프의 이론이 항상 맞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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