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은 끝없이 교류해왔다. 음악비평가 최유준은 아예 둘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지우고 그냥 ‘음악’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서구에서도 21세기 들어 ‘음악 이분법’의 신화는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란 책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클래식이나 대중 음악이나 결국은 같은 음악 현상을 다루는 것 아닌가라고 필자는 속 편하게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대중 음악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나는 게 클래식과 국악이라고. 이 생각은 전문가들도 비슷한 듯하다. 미국의 음악인지심리학자 대니얼 레비틴은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 있다. 클래식은 다른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음악이란 것이다. ‘어떻게 로큰롤이라고 하는 반복적이고 요란한 쓰레기를 감히 위대한 거장들의 숭고한 음악에 갖다 댈 수 있다고 하는 거지?’ 이런 입장은 위대한 거장들에게 기쁨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주요 원천이 바로 당대의 ‘흔해빠진’ 대중 음악이었다는 불편한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모차르트와 브람스, 바흐조차 방랑시인의 발라드와 유럽의 민속음악, 동요에서 많은 선율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리듬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선율은 계급이나 교육, 환경을 가리지 않는다.” 이 말에서 ‘로큰롤’ 대신 ‘뽕짝’이나 ‘유행가’를 집어넣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클래식과 대중 음악의 만남에는 크로스오버와 샘플링이 있다. 크로스오버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섞임’의 음악이란 뜻이고, 샘플링은 기존 팝·클래식 음반의 연주 음원을 그대로 따서 쓰는 작곡 기법을 말한다. 국내외 대중 가요에는 숱한 사례가 있다. 민해경이 1981년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1악장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갑론을박 끝에 작곡자가 몇 소절을 ‘인용’했음을 시인했다.
작고한 미국 가수 존 덴버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특정 선율에 가사를 붙여 곡을 만들었다. 1974년 발표한 ‘애니의 노래’다. 신승훈의 발라드곡 ‘보이지 않는 사랑’(1991)도 클래식을 샘플링한 가요다. 그는 “고교 시절 시험을 봤던 베토벤의 가곡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 /유튜브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1997·이현우 작사, 김홍순 이현우 작곡)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의 제4곡인 겨울에서 선율을 빌려왔다. 여성 3인조 씨야가 2007년 부른 ‘사랑의 인사’는 친숙한 엘가의 동명 바이올린 소품 선율을가져다 썼다.
며칠 전 광주문화재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모티브로 한 창작 관현악곡 작품을 공모한다고 밝혔다. 이 곡은 대중 가요라기보다는 ‘민중 가요’로 분류되지만, 공모 자체가 클래식-대중 음악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역사는 그야말로 수난사였다. 이 노래는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창작됐다. 신랑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었다. 신부는 그와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다 1978년 사고로 숨진 박기순이었다. 작곡은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작사는 백기완의 시를 기초로 작가 황석영이 했다.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 안 윤상원·박기순 열사 묘비 앞에 휴지로 만든 국화가 놓여 있다. /한겨레신문
이후 널리 유포돼 5·18 정신을 기리는 대표적 노래로 자리 잡았고, 광주 민주화운동 추모행사에서 제창돼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부터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행사로 밀렸다. 남한 혁명을 선동하는 혁명가요라는 터무니없는 색깔론도 따라다녔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추모행사에서 제창되고 있다. 그런 사이 동남아 등 적지 않은 외국에도 전해져 노동운동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 수난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권력의 자의적 개입이다. 대중 음악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려 하며, 비판과 저항을 피하지 않는다. 반면 정치는, 특히 잘못된 권력은 이런 음악을 통제하려 애쓴다. 지난 시절 보훈처는 2013년 4월 등 두 차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하는 공식 추모곡을 공모한다고 밝혔다가 여의치 않자 철회한 바 있다. 머지않아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이 노래를 들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 금석지감이 든다. 2018.03.2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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