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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역사에 떠넘기기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암살되기 하루 전날, 그러니까 1963년 11월21일 매사추세츠주 상원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가 훗날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역사는 우리에게 네 가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었나. 현명한 인간이었나. 성실한 인간이었나. 헌신하는 인간이었나.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가 결정된다.” 결과적으로 이 연설은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내용이 되고 말았다.

케네디가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은 자고로 역사란 말을 가장 즐겨 입에 올리는 부류였다. 그 레토릭은 다양하지만 ‘역사의 심판대’처럼 대체로 엄숙하다. 이들은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많이 쓰는 말투로는 단연 “내 공과는 후세 사가들의 평가에 맡기겠다”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평가를 역사에 맡겨버리면 이점이 있다. 우선 진중하며 사려 깊어 보인다. 권력게임, 정치공학적 계산에 노심초사하는 내면이 심오한 역사의식의 이끌림을 받는 것처럼 분식된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은 별것 아닌 일에도 거창한 ‘역사성’을 부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만큼 정치행위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겠지만, 이래저래 정치인과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이러니는 가장 역사를 즐겨 말하면서 역사의 심판대에 자주 오르는, 역사적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바로 정치인이란 사실이다. 역사를 의식하고 두려워한다면서도 진심으로 역사와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007년 8월 한 미국 해군병사와 아름다운 신부의 결혼식. 2년 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신랑 지겔은 자살폭탄의 공격을 받은 트럭에 갇혀 있다 얼굴이 녹아내렸다. 열아홉번의 수술을 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사랑한 연인 클라인과 결혼했다. 오바마는 엊그제 이라크 전쟁의 공과에 대해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엊그제 이라크 전쟁의 공과에 대해 “나는 역사가 이라크로 치고 들어간 최초의 결정에 대해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설적으로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표현한 건 아니지만 그게 그 말이다. 이렇게 에둘러 말한 건 2002년 상원의원 시절 부시가 곧 벌이려는 이라크 전쟁을 ‘멍청한 전쟁’이라고 비판한 전력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미군이 지난 9년간 이라크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바마의 언명을 접하며 “오바마, 너도냐”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도 정치인으로서 부시가 저지르고 자신이 설거지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떠넘기려는 것이다.

입력 : 2011-12-13 21: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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