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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닷컴] 촛불정신 잊어버렸나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9월 미국의 세계시민상을 수상하며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겨울 촛불혁명으로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대통령입니다. 촛불혁명에 함께 했던 나는 촛불정신을 계승하라는 국민의 열망을 담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10월 28일 촛불집회 1년을 맞아 “촛불의 열망과 기대, 잊지 않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앞세우겠습니다”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시민이 들어 올린 촛불의 정신이 만든 대통령이다. 장면을 바꿔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시절인 2016년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촛불을 들고 있다.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최저임금 1만원, 정규직 임금의 80% 공정임금제, 노동존중 세상을 약속했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 말처럼 ‘이니가 알아서 다 해줬습니까’”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박금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위원장은 이렇게 외쳤다.

 

민주노총이 연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좀 길다. ‘최저임금삭감법 폐기 하반기 총력투쟁 선포 및 6·30 비정규직 철폐 전국노동자대회’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인 8만 명이 모였다. 민노총 조합원 80만 명 가운데 10분의 1이다. 지방에서 조합원들이 타고 온 버스만 900여 대에 달했다. 이를 전체 노동자 중 ‘일부’라고 무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이를 지켜보며 기시감과 금석지감이 교차했다. 기시감은 이곳에서 열린 촛불집회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남녀노소 시민들이 이곳에 나와 자기 삶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공감을 나누었다. 비정규직, 실업 문제, 자영업자의 고충 등 매우 절절하고 다양했다.

 

금석지감이 드는 것은 그 시절이 까마득한 옛날로나 여겨질 만큼 구호나 주장이 변했기 때문이다. 민노총은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산입범위에 상여금과 복리후생비(식대 등)를 포함시켜 최저임금 인상 효과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고 말한다. 또 7월부터 시행키로 했던 300인 이상 사업체의 ‘노동시간 주52시간 상한제’도 6개월 처벌유예 조치 등으로 인해 무의미한 정책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요컨대 정부 여당의 노동정책 기조가 친자본, 친재벌 정책으로 급속히 방향 전환을 하면서 현장 노동자들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어찌된 영문일까. 적폐 청산하겠다고 해놓고 정권 잡고 보니 생각이 달라진 걸까. 집권하고 보니 현실이 녹록치 않다거나 보수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거나, 만사에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거나….

 

전교조가 법외노조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현실도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는 손꼽히는 적폐 1순위였다.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10월 해직교사 9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는 이유로 고용노동부로부터 법외노조 통보를 받았다. 법외노조는 단체교섭권, 협약체결권, 노조전임자 파견권 등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불복한 전교조는 법외노조 통보처분의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지만 1·2심은 법외노조 통보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소송은 전교조가 2016년 2월 상고한 이후 29개월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지난달 19일 김영주 노동부 장관이 정권 출범 뒤 처음으로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법외노조 통보처분) 직권 취소 여부를 검토한 후 청와대와 상의해 처리하겠다”고 이전보다 진전된 말을 했다. 그러나 하루 만인 20일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정부가 직권 취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김 장관의 말을 뒤집었다.

 

김 대변인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법외노조 통보는 행정처분이며, 소관부처가 직권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욱이 법외노조 취소 소송은 엄연히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도 대법원 판결이 이미 끝났으니 재심이나 기다리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사안에 대한 이해 부족과 무책임의 소산이다. 더욱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재판 거래 의혹에도 포함돼 있는 것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이다.

 

이 일에 대해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전 서울시 교육감)이 페이스북에 이런 평을 했다. “청와대는 단 하루 만에 전교조 지도부와 어떤 추가적 대화나 협의, 설득 노력도 없이 알량한 법논리를 내세우며 직권취소는 안된다고 결론내리고 못 박았다. 대변인 발표에선 문재인 청와대 특유의 따뜻함, 공감, 배려, 존중의 언어를 찾아볼 길이 없다.”

 

그렇다. 노동자들이 ‘촛불정권’에 우선 바라는 건 이전 정권들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한 배려일 것이다. 어제의 우군이었던 노동자들을 배신감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차가움이 아니다. 

2018.07.03 0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