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과 이란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발단은 13일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유조선 2척이 잇따라 피격된 사건이었다. 미국 측은 즉각 이란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피격당한 고쿠카 커레이저스호 공격에 사용된 선체 부착식 기뢰가 이란군 군사행진에서 공개된 기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란은 유조선 공격이 미국·이스라엘 정보당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일주일 뒤 이란은 자국 영공을 침범한 미국의 무인정찰기(드론)를 미사일로 격추시켰다고 발표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지시했다가 철회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지난 20일의 상황이다. 트럼프는 이란을 공습할 경우 예상 사망자 수가 150명에 이를 것이란 답변에 이란 공격을 철회했다고 한다. 전쟁이 자신의 재선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주위 의견도 고려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왼쪽부터)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회담을 위해 백악관 집무실에 모여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무인정찰기(드론) 격추 이후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을 승인했다가 이를 돌연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페르시아만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국제유가가 출렁이며 중대한 분쟁이라도 터지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우리가 중동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 국면은 넘긴 것 같지만 그날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백악관은 온종일 부산했다. 오전 7시부터 관련 회의만 4차례나 열렸다. 국방장관 대행, 중앙정보국(CIA) 국장, 합참의장 등이 불려왔다. 국방부는 이란 공격 공식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초 트럼프를 비롯한 백악관 기류는 대 이란 군사행동을 선호하는 쪽이었다. 트럼프는 NBC방송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신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말살(obliteration)이 일어날 것이다.” 으시시한 협박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미국이 개입한 전쟁이 200개 이상

유조선 피격은 아베 일본 총리가 이란을 방문해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만난 때 일어났다. 하메네이는 아베에게 “이란은 미국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란에 고조된 반미정서의 표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8월 이란 국제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했고, 올 4월에는 이란산 원유 금수 조치로 이란 최대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미국이 못 미더운 사람은 하메네이나 이란인 말고도 많다.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2003)이란 책에서 군사전문가 홍윤서는 “미국인들이 신대륙 원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는 잔혹행위를 저지른 이후에도 항상 주변 국가들을 탐내 150회에 걸친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터진 약 250개의 전쟁 가운데 미국이 개입한 전쟁이 200개 이상이라는 집계도 있다. 이를 근거로 미국을 원래부터 막강한 군사력에 의존하는 군사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벌인 대표적 명분 없는 전쟁으로 꼽힌다. 1964년 베트남에서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선제공격한 사건으로, 이 해상전투를 빌미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1971년 미국 국방부 보고서는 이 사건이 미국측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1995년 회고록에서 이 사건이 미국 자작극이었다고 실토했다.

미국의 군사적 행적에 대한 검토 필요

2003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웠다. 그러나 모두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전력이 있는 미국이 그럴듯하지만 조작된 명분을 들이대며 이란을 치는 시나리오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은 “미국의 도움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이 미국에 비판적 인식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지난 70년간 미국의 군사적 행적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우리의 미래 행보를 정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것은 친미·반미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 무작정 갖고 있는 ‘평화애호국’이란 고정관념이 커다란 착각일 수도 있다.

2019-6-4 05:00:11 게재

 

 

Posted by 김철웅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얼마 전 중국에 여행하고 온 지인한테 들은 말이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분위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영 중국중앙(CC)TV는 아침 7시 뉴스가 시작되면 곧바로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방영한다. ‘일어나라/ 노예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 장성을 쌓자…’

방송 뉴스를 이런 전투적 국가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바로 지난달부터였다. 도화선이 된 것은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다.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하고 중국 통신장비 제조업체 화웨이(華爲)에 대해 미국이 강한 압박을 해오자 정부가 착안한 게 국민들의 애국심이었다. 공산당 중앙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이 올해 말까지 매일 오전 국가를 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신중국 창립 70주년(10월 1일)을 경축한다는 명목이기도 했다.

항일 전쟁 영화 ‘갱도전(Tunnel War)’ 주제가에 미·중 무역 전쟁 내용을 넣어 개사한 노래도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는 애플 아이폰과 KFC, 맥도날드,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불매운동을 주장하는 글이 넘쳐난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생각이다. 중국이 온통 국가주의의 열풍에 휩싸인 것 같다.

픽사베이

장면을 홍콩으로 돌려본다. 지금 홍콩은 중국의 국가주의·애국주의와는 사뭇 다른 시민들의 열기가 표출되고 있다. 수많은 홍콩 시민들은 올봄부터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참여 인원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민간인권전선 추산으로 지난 9일 103만 명이었고, 16일엔 200만 명에 육박했다. 홍콩 인구가 744만 명이니 27%에 해당한다.

그 열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범죄인 인도 조례’가 문제가 된 이유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발단은 지난해 초 한 홍콩 대학생이 대만에서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한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과 홍콩은 범죄인 인도 협약을 맺지 않았고 홍콩은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이것이 친중 의원과 홍콩 정부가 조례를 추진한 배경이었다. 시민들은 이 조례가 너무 포괄적이라 반중 인사들과 중국에 협조적이지 않은 인사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홍콩 정부는 결국 송환 조례 검토를 무기 연기했지만 주최 측은 송환법 완전 철회, 시위에 대한 폭동 규정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 사퇴, 체포자 전원 석방 등 5대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이것은 홍콩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법치의 보장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홍콩이 중국에 종속될 뿐 아니라 아예 홍콩이란 공간이 형체조차 없어질 것이란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을 이끈 조슈아 웡(23)은 홍콩이 중국 본토와 달리 민주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홍콩에 적용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근본적인 사기”라고 했다. 중국은 ‘일국양제’를 약속한 50년 동안 ‘홍콩의 중국화’를 향해 가고 있지만 홍콩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웡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홍콩이 하나의 완전한 민주·자유 지역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웡은 17살 나이로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우산혁명을 주도했다.

많은 홍콩 시민들이 간접선거로 뽑힌 중국 중앙정부의 꼭두각시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국무원에서 정한 절차를 거쳐 임명한다. 이런 점에서 홍콩의 송환 조례 반대 시위는 2014년 좌절한 우산혁명의 속편 격이다. 크게 보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인 것이다. 5년 전 시위는 79일 만에 강제 해산으로 끝났다.

홍콩 시위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의 촛불집회와 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있다. 앞서 웡도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집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말했다. 홍콩 시위대에 의해 한국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절반은 한국어로, 절반은 광둥어로 불린 것도 흥미롭다. 하지만 중요한 건 촛불집회와 닮았다 안 닮았다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2019.06.24 09:01

Posted by 김철웅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