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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미국 ‘패거리 자본주의'의 위기

입력 2002.07.28 18:11〈김철웅·국제부장〉

미국의 국가 현안이 정치에서 경제로 급속히 그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기업 회계부정 사태 때문이다. 9·11 테러는 국민들이 정부를 믿게 하고 미국을 결속시킨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내부의 적은 미국을 일대 신뢰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화시대 자본주의의 글로벌 스탠더드와 시장 투명성의 전도사를 자임하던 미국이 이같이 정실자본주의의 폐해에 노출된 것은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 충격파는 더욱 크고 세계적이다.

요즘 회계부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신뢰’와 ‘신용’이란 단어를 부쩍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미국민이 미국과 미국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방증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여전히 ‘악’과의 전쟁을 쉴 새 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는 테러리즘을 ‘악’으로 규정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북한이 ‘악의 축’으로 분류되는 불운을 맞은 것도 그 와중이었다. 그러다가 회계부정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다시 회계부정이란 ‘악’을 척결하겠다고 나섰다.

부시 대통령이 이같이 큰 사안마다 선과 악의 개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그의 보수적·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련있어 보인다. 이에 대해 미국 사회학자 엠마뉴얼 월러스틴은 “부시가 저명한 신학자는 아닌 것으로 안다”면서 “서양의 위대한 세가지 종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악의 존재이유란 문제에 대처해온 방식은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고 말함으로써였다”면서 부시의 단순 우직한 선악관을 꼬집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3원 12일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철강·알루미늄 25% 관세를 부과하면서 글로벌 무역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캐나다를 향한 추가 관세 위협이 불과 6시간 만에 철회되는 등 오락가락하는 정책이 시장 불안을 더욱 키웠다. 유럽연합(EU)은 이에 맞서 260억 유로(약 41조원) 규모의 미국산 제품에 보복 관세를 예고하며 미국과의 통상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아무튼 스캔들의 차원을 넘어서 미국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이번 회계부정 사태의 파괴력이 9·11 테러보다 훨씬 큰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전세계적 영향력을 ‘소프트 파워’란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는 조지프 나이 교수는 이번 사태로 유럽이나 일본과 구별되며 비(非)정실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식 모델에 대한 신뢰가 손상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나이 교수는 소프트 파워를 군사력·경제력 같은 ‘하드 파워’와 구분되는, ‘국제사회에서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도덕적 권위나 가치와 같은 것이다. 그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사용하는 권력 가운데 바람직한 소프트 파워가 이번 사태로 훼손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신뢰의 위기에 대한 경고가 나오고 있지만 부시 대통령과 미국 지도층은 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지난주 의회를 통과한 기업개혁 법안이 진정한 기업 회계부정 방지와 거리가 멀다해서 솜방망이란 평가를 받은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부시 행정부에서 이렇다 할 신뢰회복의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유권자들의 기억력은 짧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집권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할 때 경제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부시 대통령에게도 현재의 사태 진전은 그의 아버지 부시가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91년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18개월도 채 못돼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경제 때문에 그는 92년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란 슬로건을 내걸고 나선 클린턴 후보에게 맥을 못춘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취임 후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다가 9·11 발생과 반 테러전쟁 국면에서 지지율이 크게 오르는 덕을 보았다. 경제도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는지, 회계부정 사태가 터짐으로써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지지율도 떨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부시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강경파들이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과 같은 수순으로 국면타개에 나설 가능성이 종종 거론된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은 이만저만 사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이 교수의 개념을 빌리면 미국이 소프트 파워에 의한 세계의 리더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드 파워 의존 일변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후 반세기를 풍미한 군산복합제의 회전문은 냉전 구조의 고착화로 나타났다. 사상 첫 MBA출신 대통령과 재·정(財·政)간의 회전문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