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저지른 잘못에 사죄하는 독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헌화 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브란트는 한동안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묵념했다. 나치에 희생된 폴란드 유태인에게 올린 진심어린 사죄였다. 훗날 이 돌발 행동에 대한 브란트의 설명도 유명하다. “나는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에 무릎을 꿇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지난달 29일 도쿄 한 우익단체의 강연장.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바이마르헌법 아래서 나치정권이 탄생했다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헌법을 바꾼 독일 나치의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고 말했다. 개헌 논의를 조용히 진행하자는 취지로 한 말이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법률 제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민주주의적 헌법의 효시라는 바이마르헌법은 사실상 폐기됐다.
지난 4월 야스쿠니 춘계 예대제 제사 때 일본 여야 의원 168명이 집단 참배하고 있다.
나치의 범죄행위에 사죄해 무릎 꿇은 독일 총리와 언죽번죽 ‘나치 스타일 개헌’을 설파한 일본 부총리.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베의 자민당 정부가 평화헌법을 고쳐 군대를 보유하고 ‘정상국가’로 가려고 애쓰는 건 잘 안다. 편법으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해석을 고치려는 것도.
그런데 타산지석으로 삼자며 든 예가 왜 하필 나치 정권이었을까.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잠재의식 속 ‘추축국(樞軸國)의 추억’이 작동했을 수 있다. 2차대전 때 나치 독일과 일본은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Axis Powers)’ 동맹을 자처했다. 세계를 바꿀 중심축이란 뜻이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 때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일컬은 건 그 리바이벌인 셈이다.
인물론적 접근도 할 수 있다. 아소의 증조부 아소 다키치는 일제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아소 탄광을 창업했다. 이 탄광은 조선인 등 많은 외국인들을 징용 착취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1940년생인 아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려서 전혀 기억이 없다고 발뺌한다. 반면 젊은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 브란트는 나치 때문에 노르웨이로 망명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치로 인한 희생자들 앞에 무릎 꿇었다. 과거사 청산,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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