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만한 천재’란 찬사를 듣는 슬라보예 지젝이 이런 걸쭉한 농담을 했다. 15세기 몽골 지배 러시아에서 한 농군과 아내가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 전사가 농군에게 그 아낙을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일을 치르는 동안 네가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 몽골인이 일을 마친 후 가버리자 농군은 기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아내가 놀라 까닭을 묻자 농군이 답했다. “그 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 | 경향신문 DB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 | 경향신문 DB
이것은 옛날 사회주의권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서 회자된 농담으로, 그들의 항거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이었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반체제 인사들은 당의 노멘클라투라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민중을 강간하는 동안 실제로 한 일이란 기껏 노멘클라투라의 고환에 살짝 때를 묻히는 정도였던 것이다. 지젝은 자신의 저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2009)에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오늘날 비판적 좌파는 그와 유사한 입장에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건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이야기는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를 상기시키는 구석이 있다. 시 속의 ‘나’는 비판적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무기력한 소시민이다. 나는 탄식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그러나 이 탄식이 그저 소시민의 넋두리에 그쳤다면 저항시인 김수영의 명편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시의 행간에는 비판과 저항에 대한 고통스러운 열망이 감춰져 있다.
두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신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비판이다. 그런데 이 비판은 각각 다른 이유로 억제돼 있다. 지젝의 반체제 지식인은 이만하면 충분히 비판을 하고 있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고, 김수영의 소시민은 제대로 된 비판은 엄두도 못내고 돈 몇 푼 받으러 온 야경꾼이나 증오하고 있다.
시공을 넘어 이것은 지금 이곳 지식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세상천지가 분노할 것, 비판할 것들로 넘쳐난다. 여기엔 신문이 산증인이다. 신문은 매일매일 추악한 뉴스들을 끝도 없이 토해낸다. 미칠 것 같은 세상, 썩어 문드러진 세상, 대통령은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라며, 온통 썩은 나라라며 비평가처럼 관전평이나 하는 세상이다. 빈부격차 확대, 기득권자의 탐욕, 권력의 남용, 공직자들의 모럴 해저드·부패 심화, 노블레스 오블리주 붕괴, 이런 것들이 가속화하고 있는 현실이다. 종교도 예외없이 썩었다.
이럴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감시견 역할을 하는 언론이다. 그러나 이 시대 이 사회의 언론은 도리어 이를 묵인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사회정의는커녕 자사 이기주의 구현에 앞장서고 있다. 언론 스스로 친기업 반노동의 번견(番犬) 노릇을 자임했다.
5공 시절 입사한 필자에게는 밝고 아름다운 기사를 찾으란 데스크 지시로 미담(美談)기사를 찾아 헤맨 추억이 있다.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엄혹한 겨울공화국에서 밝고 따뜻한 기사는 그것 자체로 형용모순이었다. 신문을 미담으로 도배한다 해서 추악한 세상이 아름다워질 리는 없었건만 그땐 그랬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데스크가 미담기사를 요구하거나 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세상이 깨끗해져서가 아니다. 더 교활해지거나 더 뻔뻔스러워져서다. 한홍구 교수는 어느 글에선가 “1970~80년대엔 보수파가 적어도 친일이나 일제를 미화·옹호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대놓고 옹호하려는 현상이 있다”며 “우리 사회에 부끄러움과 정의감이 상실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시 첫머리에서 지젝과 김수영이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자. 오늘의 지식인들은 그만하면 충분히 권력자들을 비판했는가. 아니다. 때를 묻히는 것 정도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거세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비판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더욱 많이 비판해야 한다. 지식인들은 고궁을 나서는 ‘나’처럼 무기력한 모습인가. 안된다. 애꿎은 야경꾼을 증오하느라 무기력과 피로감에 빠져버려서는 안된다. 과녁을 제대로 겨냥해 명중시켜야 한다. 이 어지러운 세상은 묻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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