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 칼럼

[김철웅 칼럼]황당한 가정법들

김철웅 2026. 10. 19. 20:39
중학교에 들어가 배운 영어 가정법 가운데 “내가 새라면 너에게 날아갈 텐데(If I were a bird, I could fly to you)”란 문장이 생각난다. 현재나 과거 사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인 가정법은 표현과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 준다고 배웠다.

이를테면 “너는 꼴등만 한다”는 직설법보다 “네가 꼴등만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가 듣기 좋다. 가수 안치환은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랠 하겠네”라는 훌륭한 가정법을 구사해 곡을 만들었다. 하지만 가정법도 의약품처럼 오·남용이 많다. 문제는 황당한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 교묘하게 동원돼 사람을 미망에 빠뜨리는 가정법의 폐해다. 때문에 이런 괴논리 속에 도사린 가정법의 함정을 가려낼 필요가 있다.

#안치환 <내가 만일> 1995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최근 ‘반미의 해법’이란 칼럼에서 미국 지인의 말을 빌려 “올림픽 성화봉송과 관련해 한국내 미국인이 중국인이 했던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라고 묻고 “한국은 ‘촛불’로 뒤덮였을 것이고 곳곳에서 보복행위가 없었으리라고 장담하기 힘들다”고 자답했다. 이어 요즘 쇠고기 파문에 대해 “쇠고기 수입국이 미국이 아니고 영국이나 프랑스, 중국, 일본이었다 해도 ‘우리 국민 다 죽인다’며 연일 비난했을까”라고 썼다.

美쇠고기에 교묘한 논리 동원

이런 가정법은 간단하게 무력화할 수 있다. 가정법은 사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상정한다. 따라서 논리 전개를 위한 가정은 엄밀해야 한다. 제멋대로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분명히 해야 할 건 미국은 미국이지 영국이나 프랑스, 또는 중국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는 “다른 나라라면 그냥 넘어갈 것도 미국이 관련됐다면 좌파가 걸고 넘어지고…”라고 개탄했지만 쇠고기 문제의 본질은 이념이 아니다.

또 설사 이 파문이 반미주의의 표출이라 쳐도 오늘날 반미는 세계적·보편적 현상이다. 반미는 우리보다 유럽에서 훨씬 뿌리 깊고 다양하다. 안드레이 마코비츠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미국이 미운 이유(원제:왜 유럽은 미국을 싫어하나·2007)’란 책에서 “미국화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동의어가 돼 있다”면서 “미국인들은 어떤 일을 해도 욕을 먹고 안 해도 욕을 먹는다”고 진단한다. 김 고문은 촛불집회를 반미선동으로 몰기 위해 교묘한 가정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반미’를 누르면 자판기처럼 바로 ‘친북 좌파’가 튀어나오던 시대는 지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찬성론자들은 아마 인간광우병이 ‘발생하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김종혁 중앙일보 사회부문 에디터는 미국에서 3년 동안 특파원을 했다며 “내가 만일 광우병에 안 걸리고 살아남으면 요즘 벌어진 이 상황들(촛불시위 등)을 후대에 전할 것이다”란 칼럼을 썼다.

또 이 신문 김영희 대기자는 ‘미국산 쇠고기, 내가 먹어주마’란 칼럼에서 “미국이 쇠고기 수입중단 사태를 피하려면 건강한 소를 키우면 될 것”이라며 “그렇게 믿고 미국산 쇠고기를 열심히 먹으련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단호한 가정법에는 미국 관리들의 말에 대한 무한한, 불가사의에 가까운 신뢰가 깔려 있다. 그러니 미국의 위생 검역체제의 허점을 의심하고 아무리 확률이 낮더라도 치명적인 광우병이 “만약 발생한다면”이란, 지극히 정당한 가정법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난주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선 협박성 가정법이 등장했다. 그는 쇠고기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광우병 괴담’ 탓으로 간단히 돌려버린 뒤 “이 시점에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쇠고기에서 드러난 우리 협상 실력으로 볼 때 한·미 FTA가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지 심히 의심스럽다. 더욱이 ‘강부자’ 내각·비서진을 거느리고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이 대통령이 말하는 그 선진국이란 것의 그림은 벌써 그려진다.

공포 부추겨온 버릇 아직 못고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가정법의 세계는 계속 펼쳐질 것 같다.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얼치기 친북좌파 이념으로 나라를 김정일 집단에 바치려는 의도가 없다면”이라며 호통치고 “북한이 간첩을 시켜 서울시내 지하철역에 독가스를 풀었다면”이라고 불안심리를 부추겨온 저들의 버릇이 쉽게 고쳐질 리 없기 때문이다.  입력 2008.05.27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