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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친일파 후손의 용기

엊그제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이 “할아버지의 땅 찾기 소송을 취하(取下)하자”는 기자회견을 했다. 지금도 조상 땅을 찾겠다는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여럿 진행되고 있는 판이다. 한데 소송을 그만두자니 무슨 소린가.

사연은 이렇다. 일제 때 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민영은은 1남5녀를 뒀다. 직계 후손 5명이 재작년 충북 청주시를 상대로 시내 도로 등 땅 12필지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 1심에서 이겼다. 민영은 자녀 중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딸 정숙씨(85)는 두 아들을 통해 이 토지반환 소송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했다. 청주시가 패소하더라도 자신 몫은 청주시에 기부하겠다고도 했다. 왜 그럴까. 아들 권호정씨(60)는 “외할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해 후손으로서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 있는 민영은(閔泳殷)의 묘. 자식 중 한 명이 그의 소유 지에 대한 반환소송을 중단하자고 제안해 눈길을 끈다.

 

말이 그렇지, 자기 조상의 잘못, 그것도 역사적 과오를 선선히 인정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후손들은 대개 선조가 친일파란 사실 자체를 필사적으로 부인한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흡사하다.

두세 명 정도의 예가 떠오른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내정자는 과거 쓴 책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펴며 “일제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토지제도가 확립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 논법대로라면 1913년부터 충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적극 협력한 예의 민영은은 조국 근대화의 첨병으로 평가돼야 하나. 아니면 주권 대신 근대화를 선택한 현실주의자?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이 친일청산 문제에 부정적인 것은 그 심리의 나변에 선조의 기억이 깔려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돼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아버지가 경북도회 의원,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를 지낸 친일파란 세간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며 부친은 일본 헌병대의 ‘제거 대상’이었다는 등 근거를 대고 있다.

조상이 친일파로 지목될 때 가계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 후손으로선 변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을 거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껄끄러울 수 있다는 이유로 함부로 지워질 수 있다면 그건 역사가 아니다. 민영은의 후손은 이 진리를 받아들였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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